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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백수'와 모험 같은 결혼, 모두가 말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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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2회   작성일Date 22-09-2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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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오마이뉴스 ⓒ박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65750

    [이희호 탄생 100주년 ③] 젊은 날의 이희호, 김대중을 만나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은 그의 당선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 여야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재임 중 IMF 국가 부도의 극복으로 국가 경제의 안정과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평화 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큰 업적을 남겼다.

    이희호 여사는 남편 김대중 대통령을 성공한 정치인으로 인도한 조력자다. 2022년 9월 21일은 이희호 여사 탄신 100주년 기념일이다. 그날을 맞아 이희호 여사의 인생 역정을 간략히 소묘한다.[편집자말]
    충남 예산 삽교보통학교 부설 청년연성소 지도원 시절의 이희호(앞 열 오른쪽에서 두 번째).
    ▲  충남 예산 삽교보통학교 부설 청년연성소 지도원 시절의 이희호(앞 열 오른쪽에서 두 번째).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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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전, 서울사대 그리고 미국 유학 시절

    이희호가 이화여전을 다녔던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일제강점기 말기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청춘은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이희호는 그 시절 교내 연극반원으로 희곡 작품을 무대 위에 자주 올렸다.

    그 시기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일제의 황국신민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치자 이희호는 연고지인 충남 예산의 삽교보통학교 부설 '청년연성소'로 가서 지도원이 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했다.

    이희호는 해방 후인 1946년 9월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뒤, 3학년 때 교육학과로 옮겨 1950년에 졸업했다. 그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때 이희호는 친구 김정례와 함께 대한여자청년단 부단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서울사대 시절 연극 공연 기념(뒷줄 오른쪽 두 번째 이희호)
    ▲  서울사대 시절 연극 공연 기념(뒷줄 오른쪽 두 번째 이희호)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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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는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을 하고 싶었다. 여성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다. 남성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전사를 하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순국선열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여성 희생자들에게는 불명예와 수모가 따르기 일쑤였다. 무심코 던지는 말에도 여성을 얕잡아보는 말이 수없이 많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남아일언 중천금.' '남자는 도둑질 말고는 뭐든지 해도 된다.' 등등.

    부산 피란 시절 이희호는 사귀던 한 남성과 헤어졌다. 그 남성은 서울문리대 정치학과 학생위원장이자 서북청년단으로 우익 학생운동의 기수였다. 그런데 그는 당시 결핵병을 앓고 있었다. 
     

    재미 유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 동료 노동자들에게 붓글씨를 써서 선물로 주었다.
    ▲  재미 유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 동료 노동자들에게 붓글씨를 써서 선물로 주었다.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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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이희호는 미국 유학과 그 남성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마침 강원룡 목사를 만나 그분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강 목사는 '모든 것을 툴툴 털어버리고 유학을 가라'고 권고했다. 이희호는 강 목사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죄책감은 오랫동안 이희호를 떠나지 않았다.

    1958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서른일곱 나이로 귀국했다. 하지만 정착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학문의 길을 걸을 것인가, 사회운동에 나설 것인가. 두 길 사이에서 무척 고심하다가 YWCA(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 직을 맡으며, 이화여대에 출강과 함께 사회운동을 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이대 사회사업과 강사 시절 제자들과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  이대 사회사업과 강사 시절 제자들과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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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을 만나다

    1959년 늦은 여름, 이희호는 서울 종로 거리에서 우연히 김대중과 마주쳤다. 피란지 부산에서 '면우회'란 모임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었다. 무척 반가웠다. 가까운 찻집으로 갔다. 서로 안부를 묻고 곧장 헤어졌다. 그때 김대중은 정치에, 이희호는 여성운동에 한창 빠져 있었다. 서로의 근황은 풍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이따금 만났다. 당시 김대중은 주머니가 텅텅 빈, '정치 백수'였다. 게다가 군사정권의 정치 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도 할 수 없는, 앞날조차 불투명했다. 더욱이 그 무렵 김대중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마치 밤길을 가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억세게 운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희호는 김대중을 만나면 상대의 곤궁한 처지를 자기 일처럼 걱정하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김대중에게 이희호는 구세주와 같았다. 이희호의 매력은 은은함에 있었다. 당시 이희호는 이지적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여성 지도자였다. 하지만 교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만나면 주로 정치 얘기를 나눴다. 날이 갈수록 서로의 내면 깊이를 이해하게 됐다. 사랑은 무르익어갔지만 모든 악조건만 두루 갖춘 김대중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희호가 적극적이었다.

    당시 이희호는 YWCA연합회 총무를 맡고 있었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집안이나 학벌 등 결혼조건이 맞지 않는, 세속적 이해관계로는 쉽게 이뤄질 수 없는 결혼이었다. 이희호는 그때의 심경을 당신의 자서전 <동행>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 사람, 김대중은 늙으신 어머니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셋방에는 앓아누운 여동생도 있었다. 또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재수생이었다. 1954년 처음 정치에 투신해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후 세 번이나 낙선 고배를 마신 좌절의 연속이었다.

    1961년 5월 13일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되었으나 사흘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돼버렸다. 그뿐 아니라 장면 정권 당시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던 경력으로 검거되어 두 차례나 구속된 억세게 운이 나쁜 남자였다.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는 큰 꿈과 열정이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반대가 심했다. 가족은 물론 친지,  YWCA 여성계 선후배들이 극구 만류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이 존재 이유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능한 정치인이 필요했다. 우리는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 이희호, <동행> 65~68쪽 

      

    김대중 이희호 결혼식 (1962. 5. 10.)
    ▲  김대중 이희호 결혼식 (1962. 5. 10.)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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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도와주세요"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세게 노크했다"라고 그때 심경을 자서전에 남겼다.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당신은 나의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김대중의 청혼의 말은 이희호의 마음을 활짝 열게 했다. 그래서 이희호는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당신을 돕겠습니다.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당신을 돕겠습니다. 당신이 마침내 대망을 이루면 그때 내 꿈도 당신의 지원을 받아 펼치겠습니다.'

    이희호는 마침내 결단했다. 그런 뒤 이희호는 홍일, 홍업 두 형제의 생모 고 차용애 씨에게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 고개 숙여 기도드렸다.
     

    "당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저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들은 1962년 5월 10일, 이희호 외삼촌댁 종로구 체부동 한옥 마당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이후 이들 부부의 인생길은 가시밭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희호는 남편 김대중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며, 가장 잘 이해하고, 아끼는 배우자가 됐다. 
     

    김대중 이희호 가족 (왼쪽부터 2남 홍업, 김대중, 이희호, 장남 홍일, 3남 홍걸).동교동 자택에서.
    ▲  김대중 이희호 가족 (왼쪽부터 2남 홍업, 김대중, 이희호, 장남 홍일, 3남 홍걸).동교동 자택에서.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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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첨언] 두 번째 만남

    1996년 5월 15일 스승의 날, 당시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내가 재직하던 학교에 오셔서 1일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서울 시내 수많은 학교 중에 유독 우리 학교로 온 것은 아마도 당신의 두 아들(김홍업, 김홍걸)의 모교로 그들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무사히 중·고교를 졸업한 데 대한 감사의 뜻도 담겨 있었나 보다. 김 총재의 일일교사 수업이 끝난 뒤 두 분은 교무실로 와서 교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몇 해 후, 나는 <샘물 같은 사람>이란 책을 펴냈다. 그 책 '사양하는 마음' 꼭지에는 내 반 두 학생(신유철·신수안)이 반장 선거에서 서로 양보하는 미덕 얘기를 썼다. 두 친구는 1, 2학기를 나눠 사이 좋게 반장 직을 맡았다. 1987년 6.10 항쟁으로 어렵게 직선제를 이룬 김영삼, 김대중 두 야권 정치지도자는 당시 국민의 여망을 외면했다. 두 사람은 끝내 단일화를 하지 않고, 황새와 조개의 고사처럼 싸우다가 어부(노태우)에게 모두 잡힌 꼴이 됐다는 얘기로 두 지도자를 고교생보다 못하다고 까칠하게 비판했다.

    그 책을 당시 선배 오선차랑 교감선생님이 여러 권을 사주셨다. 그분이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출근한 뒤 당신이 전날 창천교회에서 주일예배에 오신 이희호 장로님에게 그 책을 전했다고 말씀했다. 나는 속으로 이희호 여사가 그 대목을 보시고 매우 섭섭해 하시며, 감정이 상했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해 연말 뜻밖에도 친필로 쓴 인사와 함께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주셨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생 정치 보복을 하지 않고, 지난날 당신을 핍박했던 정적들을 용서와 화해로 껴안은 포용력은 아마도 독실한 기독교인 이희호 여사의 조력 덕분이었을 것이라고 확신을 준 일화다.
       

    YWCA 총무시절의 이희호
    ▲  YWCA 총무시절의 이희호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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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과 김대중 전 대통령 자서전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이희호 여사 탄생 100주년 기념식 및 사진전
    사진전: 2022. 9. 19~9.23 국회의원회관 제1로비(1층)
    기념식 : 2022. 9. 21. 오후 2시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KBIZ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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