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운동의 대모,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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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리즈 [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57화 내가 만난 대통령 부인 (2) 이희호
ⓒ 박도
낙도의 기적
'전국 1일 생활권'이라는 말이 나온 지 꽤 오래됐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나고 유소년 시절을 살았던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는 아직도 그 말이 통하지 않는 멀고 먼 외딴 낙도(落島)였다. 나는 2년 전, <오마이뉴스> 시리즈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를 쓰면서 여러 전직 대통령의 생가를 현지 답사했는데 하의도만은 당일치기로 취재하지 않고 이틀 일정을 잡았다.
2020년 7월 3일 이른 아침 원주를 출발해 그날 밤 목포항 부두 숙소에서 1박을 했다. 다음날 새벽 5시 30분 발 하의도 행 여객선을 탄 뒤 오전 8시 40분에야 후광마을 김대중 생가에 이르렀다. 그곳 추모관에 들르자 방명록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일필휘지로 남겼다.
"낙도의 기적!"
그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후 김대중의 전생애를 추적하면서도, '낙도의 기적'이라는 글귀는 그의 생애를 잘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엇이 '낙도의 기적'으로, 외딴 섬마을 소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을까?
그 답은 김대중 본인의 불같은 신념과 끊임없는 노력(독서)이 밑바탕으로 작용했을 테다. 하지만 그 뒤에는 한 여성이 있었다는 것을 이희호 자서전 <동행>에서 곧 찾을 수 있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날, 청와대 안방에서 부부간 나눈 이야기다.
내외가 방 한가운데 나란히 앉아 9시 뉴스를 보면서 오늘의 행사를 되새겨 보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김대중 : "갖은 고난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이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이희호 : "드디어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국민들 잘 살게 해 주세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김대중 : "당신도 수고가 많았소."
이희호 : "내가 한 일이 뭐 있다고."
김대중 : "아니오. 당신이 없었으면 나에게 오늘이 있었겠소."
그가 나의 손을 쥐었다. 긴장된 긴 하루였다. - 이희호 지음 <동행> 323쪽
▲ 만년의 김대중이희호 부부
ⓒ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정치 재수생의 손을 잡다
그 사람, 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셋방에는 앓아누운 여동생도 있었다. 또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재수생이었다.
1954년 처음 정치에 투신해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후, 한 번은 후보 등록이 취소되었고, 세 번이나 고배를 마신 좌절의 연속이었다. 1961년 5월 13일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되었으나 사흘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어버렸다. 그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장면 내각에서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던 경력 때문에 검거되어 두 차례에 걸쳐 3개월간 구속된 억세게 운이 나쁜 남자였다.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는 큰 꿈과 열정이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 위의 책 65쪽
이희호, 서울 사대문 안 부유한 전주 이씨 가문인 의사 이용기씨와 연안 이씨 이순이씨의 6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화여고와 이화여전 문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진학한 뒤, 사범대학교육학과로 전과하여 졸업했다. YWCA 총본부 외교국장으로 활동하다가 미국 램버스대학에서 사회학을 수학하고, 스카렛대학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YWCA연합회 총무를 맡은 재원이었다.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집안이나 학벌 등 결혼조건이 형평에 맞지 않는, 세속적인 이해관계로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결혼이었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당연히 주위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가족은 물론 친지, YWCA, 여성계 선후배들이 극구 만류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 <위의 책> 66쪽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이 존재 이유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 위의 책 68쪽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곧 거세게 노크했다"라고 이희호 여사는 솔직 담백하게 지난날을 고백하였다. 이후 이들 부부의 앞날은 가시밭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내란음모사건' 등 그 명재경각의 위기를 슬기롭게 벗어나 마침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에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뤘다. 이는 '낙도의 기적'을 떠난 '대한민국의 기적'이요, 평화 통일로 가는 주춧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당신들을 박해한 그 모든 이들을 용서했다. 그 연출자가 바로 이희호 여사였다.
ⓒ 박도
나는 이희호 여사를 선생과 학부모의 관계로 만났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그분 아드님 김홍걸 의원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2년간 국어를 지도했다. 사실 나는 경북 구미 태생으로, 구미초등학교와 구미중학교를 나온 토박이 경상도 구미사람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구미초등학교 대선배가 된다.
김홍걸 의원 고교(이대부고) 재학 당시 그의 집안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게 핍박을 받았던 가장 어려운 때였다. 나는 정치권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립중고교에서 외골로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때 그를 대하면 무슨 이유인지 미안했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그가 떨어뜨리고 간 시 두 편에 크게 감동된 바, 그 작품을 교내 문예현상 모집에 장원으로 천거했다. 그 인연 탓인지 먼 후일 이희호 여사와 나는 피차 현직에서 물러난, 두보의 시구대로 '꽃 지는 시절에 만나' 이후 이 여사가 돌아가시던 직전 해까지 해마다 연말이면 손수 쓴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 당신의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일 날 초대받아 처음으로 밥 한 끼 대접을 받았다. 그 답례로 내가 살았던 강원도 산골마을의 안흥 찐빵 두 상자와 옥수수 한 자루를 보내드렸다.
그날(출판기념일) 서울 63빌딩 대연회장을 가득 메운 하객 가운데 이희호 여사는 가장 먼저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때 이희호 여사가 어찌나 내 손을 꼭 잡으셨던지 그 '악력(握力)의 여운'이 사후에도 이어져 현재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나 보다.
이희호 – 그는 배우자를 통해 마침내 당신 평생의 소망을 이룬, 대단히 똑똑하고 슬기로운, 그리고 집념의 여성이었다. 또한 대한민국 여성 인권 운동의 대모요, 나아가 이 땅의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의 사도로 큰 발자국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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