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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죽이지 마” 집회에 1만명이 참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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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641회   작성일Date 20-11-1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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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제22화 김대중 ‘아시아식 민주주의’ 마중물 된 김대중·이희호의 신념
     
    1980년 미국 대선 직후의 일이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공무원들에게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레이건에게 김대중씨를 모략하는 애걸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1994년 12월8일치 <한겨레21>에 실린 독자투고다. “나 역시 윗전의 강압에 따라 김대중씨를 음해하는 편지를 레이건에게 보낸 사실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사죄한다.” 어찌 된 사연일까? 한겨레 아카이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정치 역정을 국제 정치인이라는 측면에서 돌아봤다. 해설 김태권
    1994년 11월24일치 &lt;한겨레21&gt;의 표지이야기는 “김대중의 딜레마”였다. 다음다음호 12월8일치에 ‘신군부가 김대중을 헐뜯는 편지를 미국에 보내도록 강요했다’는 증언이 투고되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94년 11월24일치 <한겨레21>의 표지이야기는 “김대중의 딜레마”였다. 다음다음호 12월8일치에 ‘신군부가 김대중을 헐뜯는 편지를 미국에 보내도록 강요했다’는 증언이 투고되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김대중이 미웠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김대중을 체포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죽이지는 못했다. 다른 나라 눈치가 보여서였다.
    김대중의 목숨은 당시 국제적 관심사였다. 다른 나라 시민이 먼저 관심을 가지고 자기네 정부를 움직인 경우도 있다. 일본이 그랬다. 이름난 작가들이 정부에 편지를 쓰고, “김대중을 죽이지 마” 집회에 시민 1만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역 앞 선술집의 젊은 주인이 5000엔짜리 지폐를 건네며 ‘나는 그 사람을 믿습니다’라고 외친 일을 잊을 수 없다.” 2006년 10월 <한겨레>에 실린 와다 하루키의 회고다.
    이 문제에 특히 관심 많던 지도자가 미국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였다. 그런 카터가 재선에 실패했다. “카터 대통령은 노심초사 나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레이건이 당선됐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죽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 나는 울었습니다.” 2006년 10월 한겨레에 실린 김대중의 회고다. “신군부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김대중 죽여도 말릴 사람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 듣고 (나를 살리고 싶어 하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미국으로 날아가 레이건 쪽에 얘기했습니다. ‘당신이 당선됐으니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그러자 레이건이 ‘그렇게 되면 세계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살리라 해서 살린 것입니다.” 미국이 김대중을 살리라며 신군부에 어떻게 압력을 넣었는지 역시 1996년 이후로 띄엄띄엄 한겨레 지면에 소개된 바 있다.

    1980년 5월17일 쿠데타 직전에 전두환과 군부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김대중의 집을 찾았다. 김대중평화센터가 제공한 사진.
    1980년 5월17일 쿠데타 직전에 전두환과 군부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김대중의 집을 찾았다. 김대중평화센터가 제공한 사진.

    1994년 6월, 김일성과 카터의 극적인 만남은 이른바 ‘북핵위기’를 진정시켰다. 지미 카터가 미국의 특사 역할을 맡게 된 것은 김대중과 박한식의 주선 덕분이라고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 제공 사진으로 추정된다.
    1994년 6월, 김일성과 카터의 극적인 만남은 이른바 ‘북핵위기’를 진정시켰다. 지미 카터가 미국의 특사 역할을 맡게 된 것은 김대중과 박한식의 주선 덕분이라고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 제공 사진으로 추정된다.

    미국 대선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가 있다. 국내 정치에 국한하지 말고 세계사의 관점에서 김대중과 이희호를 보자는 취지다. 20세기 후반에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얻어낸 예가 세계에 적지 않다. 한국은 필리핀과 닮았다. 1972년에 필리핀은 계엄을 선포했다. 10월유신 직전이었다. “차를 타고 광화문 앞을 지날 때 라디오에서 필리핀에 계엄령이 내렸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순간 한국도 계엄령이 선포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희호의 회고다. 2015년과 2016년에 고명섭은 이희호를 이십여 차례 인터뷰하여 한겨레에 ‘이희호 평전’을 연재했다.
    1982년 미국에 망명한 김대중 부부는 필리핀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베니그노·코라손 아키노 부부와 만나 친구가 된다. 전두환·이순자가 독재자 커플 마르코스·이멜다 부부와 살갑게 지낸 일과 거울상이다. 1983년 8월에 베니그노 아키노는 필리핀 귀국을 시도한다. 그런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총에 맞아 숨졌다. “필리핀으로 돌아갈 때 (베니그노 아키노는) 자기가 쓰던 낡은 타이프라이터를 우리에게 주었어요. 그게 가슴 아픈 기념품이 됐지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희호는 안타까워했다.

    박정희가 죽이려다 실패하고 전두환도 죽이고 싶었지만
    온 세계가 보호해준 정치인 독일 브란트, 미국 카터
    프랑스 미테랑, 스웨덴 팔메의 공통점은 바로 김대중을…

    1985년에 김대중도 한국으로 돌아온다. “김대중이 제2의 아키노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미국의 저명인사 27명이 김대중과 이희호의 귀국 비행기에 동승했다.” 공항에서 경찰과 김대중 일행이 엉켜 몸싸움이 벌어졌다. 카터 행정부에서 차관보를 지낸 팻 데리언이 한국 경찰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카메라 기자들이 그 장면을 촬영해 세계에 알렸어요.” 김대중과 이희호는 살아남았다.
    후일담이 있다. 1986년에 필리핀에서 피플파워 혁명이 일어났다. 숨진 베니그노 대신 코라손 아키노가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마르코스·이멜다가 쫓겨나는 꼴을 보며 전두환·이순자가 벌벌 떨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코라손 아키노는 대통령이 됐다. 팻 데리언도 김대중·이희호와 좋은 인연을 유지했다. 1994년 12월 한겨레에는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이던 김대중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한 두 사람의 사연이 실렸다.

    1994년 1월에 김대중은 아태재단의 현판식을 했다. 김대중과 이희호 사이에 선 사람이 코라손 아키노다. 진천규 기자의 촬영.
    1994년 1월에 김대중은 아태재단의 현판식을 했다. 김대중과 이희호 사이에 선 사람이 코라손 아키노다. 진천규 기자의 촬영.

    1999년 6월에 코라손 아키노는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을 찾았다. 이번 만남은 청와대에서였다. 역시 진천규 기자의 사진.
    1999년 6월에 코라손 아키노는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을 찾았다. 이번 만남은 청와대에서였다. 역시 진천규 기자의 사진.

    유신정권의 치졸한 성격을 ‘보라색 털실 사건’만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을까. 1976년에 김대중과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이 감옥에 들어가자 이희호와 양심수 가족들이 행동에 나섰다. “구속자 가족들은 V자형 보라색 목도리를 짰다. ‘V자형이어서 빅토리 숄이라고 불렀지요.’ 다 짠 목도리는 한 장에 10달러씩 받고 미국·캐나다·서독·일본의 교회와 인권단체에 팔렸다.” 돈보다도 한국의 인권문제를 세계에 알리려는 의도가 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서울의 털실 가게에서 보라색 실이 사라졌다. 마치 판매금지라도 내려진 것처럼 보라색 실만은 구입할 수가 없었다.” 실을 구하는 일조차 국제연대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나라에서 우리의 뜻을 이해하고 지원해주는 분들에게 연락하여 그곳으로부터 보라색 털실을 구입하여 보내오게 하였다.” 이종옥의 회고다.
    박정희는 김대중이 왜 미웠을까. 한때 중앙정보부를 이끌던 김형욱은 미국 정부의 청문회에 나가 “김대중에 대한 박정희의 감정은 깊은 열등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적인 증오에 가까운 것”이라고 증언했다. 에누리해서 읽을 필요는 있다. 김형욱이 박정희라면 치를 떨게 된 다음에 한 말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잘난 사람을 보면 일단 죽이고 보겠다는 것이 독재자들의 흔한 행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희호의 회고로는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둘만의 대화를 나눈 것은 1968년 신년하례식에서 5분이 전부였다고 한다. 김대중은 탄압과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끝에 “1979년 봄에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박정희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 ‘우리가 20년 가까이 대립만 하고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은 곤란한 일 아닌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 박정희는 거절했다. 얼마 뒤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권력을 잡았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사진이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이희호는 미국에 가 퍼스트레이디였던 퍼트리샤 닉슨을 면담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경찰이 사진관에 들이닥친 뒤 사진은 사라졌고, 여당은 “닉슨 대통령 부인을 만난 적도 없으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공격했다. 치졸한 공작이었다. 한 장 더 사진을 마련해두었던 덕분에 이 장면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사진은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사진이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이희호는 미국에 가 퍼스트레이디였던 퍼트리샤 닉슨을 면담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경찰이 사진관에 들이닥친 뒤 사진은 사라졌고, 여당은 “닉슨 대통령 부인을 만난 적도 없으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공격했다. 치졸한 공작이었다. 한 장 더 사진을 마련해두었던 덕분에 이 장면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사진은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대선 때 효창운동장에서 유세하는 ‘40대 기수’ 김대중. 젊고 매력있는 김대중의 존재를, 박정희는 위협으로 느꼈던 것 같다. 뒤이은 총선 때 김대중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1973년에는 악명 높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사진으로 추정된다.
    1971년 대선 때 효창운동장에서 유세하는 ‘40대 기수’ 김대중. 젊고 매력있는 김대중의 존재를, 박정희는 위협으로 느꼈던 것 같다. 뒤이은 총선 때 김대중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1973년에는 악명 높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사진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시대 한동안 김대중·이희호의 집에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라는 인사말 대신 “이름 대지 마세요”라는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정보당국이 전화한 사람을 잡아내 고생을 시켰기 때문이다. 전두환 때에는 주변 사람을 줄줄이 잡아들여 끔찍하게 고문했다. 2009년 9월 <한겨레21>에는 김대중의 맏아들 김홍일의 사연이 실렸다. “나는 혹여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할까 두려워 자살을 기도했다. 책상에 올라가 머리를 시멘트 바닥으로 처박고 뛰어내렸다.” 그러나 정보부 요원들은 “치료해주기는커녕 더 때렸다.” 김홍일은 훗날 파킨슨병에 시달렸다. 한겨레신문사의 초대 사장을 지낸 송건호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끌려가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었다. 김홍일은 자택에서 이동할 때도 휠체어와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과거사를 반성하기는커녕 ‘김대중 가족이 엘리베이터가 딸린 초호화 주택에 산다’며 트집을 잡았지만 말이다.
    김대중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전두환은 이희호를 청와대 근처 안가로 불러들였다. “자기가 사형시키려고 했던 사람의 안사람을 만났는데,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이 거리낌이 없었어요. 이야기하다 말고 바지 자락을 올리고 다리를 긁적거리기도 하고요.” 1982년 2월의 일이었다.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는 아주 정의롭고 자유롭다”고 말했다고 한다.
    1995년에 전두환은 구속된다. 사형선고를 받는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전두환 사면을 김영삼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자를 용서하다니, 아무나 못할 일이라는 점은 동의한다. 다만 전두환이 용서받기에 걸맞은 반성을 했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1998년 7월, 김대중은 전직 대통령 부부를 청와대에 초대했다. “저녁을 함께 먹은 뒤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따로 테이블을 마련해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남자 테이블에서는 전두환, 여자 테이블에서는 이순자 목소리가 가장 컸다고 한다. “아주 거침이 없었지요.” 이희호의 회고를 보며 나는 여러 감정이 들었다.

    1988년 5월15일치 &lt;한겨레신문&gt; 창간호를 찍어 내는 자리에 김대중이 함께 있었다. 곁에 선 사람이 한겨레신문 초대 대표이사 송건호다. 1980년에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전두환의 신군부에 잡혀가 고문을 받고, 훗날 파킨슨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떴다.
    1988년 5월15일치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찍어 내는 자리에 김대중이 함께 있었다. 곁에 선 사람이 한겨레신문 초대 대표이사 송건호다. 1980년에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전두환의 신군부에 잡혀가 고문을 받고, 훗날 파킨슨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떴다.

    김대중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맏아들 김홍일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조문객을 맞았다. 한창때와는 몰라볼 만큼 달라진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마음이 아팠다. 1980년에 전두환의 신군부에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것이다.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김대중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맏아들 김홍일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조문객을 맞았다. 한창때와는 몰라볼 만큼 달라진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마음이 아팠다. 1980년에 전두환의 신군부에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것이다. 지면에 실리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1980년 5월18일에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98년 8월26일에 광주 5·18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강재훈 기자의 사진이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1980년 5월18일에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98년 8월26일에 광주 5·18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강재훈 기자의 사진이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 미국의 카터,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의 공통점은? 각자 자기 나라의 민주주의 지도자였으며, 또 김대중 살리기에 발 벗고 나섰다는 점이다. 브란트와 김대중은 닮은 점이 많다. 브란트는 젊어서 히틀러 반대운동을 했고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과거사 청산과 독일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1989년 11월9일에 브란트는 서울에 있었다. “남편이 브란트 전 총리를 초청해 저녁을 대접했지요. 만찬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브란트 총리에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전갈이 왔어요. 모두 놀랐지요.” 우연이라도 의미심장한 우연이다. 김대중은 김일성과 상상 속에서 남북문제를 놓고 담판을 짓곤 했다. 이희호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중은 “감옥에 있을 때도 마음속으로 김일성 주석과 만나 남북통일 문제를 놓고 장기를 두듯이 수없이 대화를 했대요.”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 땅을 밟고 후계자 김정일을 만났다. “참을성 없고 신경질적이라던 풍문과는 아주 다른 인상이었어요.” 정상회담은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김대중의 본관 농담도 그래서 나왔다. 두 가지 버전이 조금은 차이가 있다. 하나는 2016년 한겨레에 실린, 이희호가 전한 이야기다. 전주 김씨인 김정일이 먼저 “대통령과 내가 종씨라서 잘 통하지 않냐”며 눙을 치자 김대중은 “나는 김해 김씨”라고 받았다고 한다. 또 하나는 퇴임 후 목포를 찾은 김대중의 회고. 2006년 한겨레에 실렸다. 김정일이 “대통령은 전라도 사람이라 고집이 셉니까”라고 묻자 김대중이 “전라도 사람은 전주 김씨인 위원장 아니오. 나는 김해 김씨니까 경상도 사람”이라 받았다는 것이다.
    어느 쪽 버전이건 김정일이 양보를 요구했으나 김대중이 들어주지 않았고 그 긴장을 농담으로 풀었다는 맥락이 읽힌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선정위원장은 노벨상 수상 로비가 있었냐는 질문에 ‘노벨상을 받으려는 로비가 아니라 노벨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가 있었다’고 밝히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노르웨이 현지 신문은 ‘과거에는 이런저런 자격 시비가 있었지만 김대중은 한 건의 반대의견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김대중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희호 혼자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다. 부부는 평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2000년 6월15일치 &lt;한겨레&gt;에 실린 사진이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동안 이희호는 평양 창광유치원을 찾아 어린이들과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지금 성인이 되었을 평양의 아이들이 그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하다.
    2000년 6월15일치 <한겨레>에 실린 사진이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동안 이희호는 평양 창광유치원을 찾아 어린이들과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지금 성인이 되었을 평양의 아이들이 그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하다.

    “나 김해 김씨인데.” 1997년 10월에 가락종친회 분향대제에 참석한 김대중의 모습이다. 남북정상회담의 팽팽한 긴장을 누그러뜨리려고 김대중은 본관을 이용해 농담을 했다. 지역감정과 맞서 싸운 그의 삶을 생각하면 농담의 무게가 묵직하다. 지면에 게재되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나 김해 김씨인데.” 1997년 10월에 가락종친회 분향대제에 참석한 김대중의 모습이다. 남북정상회담의 팽팽한 긴장을 누그러뜨리려고 김대중은 본관을 이용해 농담을 했다. 지역감정과 맞서 싸운 그의 삶을 생각하면 농담의 무게가 묵직하다. 지면에 게재되지 않은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김대중이 국제정세에 밝은 데에는 이희호의 공이 크다. 이희호는 당시 드물게 미국 유학까지 마쳤다. 결혼 전 이미 한국의 여성운동가로 외국에 유명했다. 결혼 후에도 “1960년대 내내 여성운동가의 길을 계속 걸었다. 활동을 접은 것은 남편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외압 때문이었다.” 김대중이 국회의원 활동을 할 때도 부부는 함께 외신을 읽었다. “뒷날 남편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외국 신문·잡지를 읽고 세계정세를 보는 안목을 키운 것이 국제사회에 구명 요청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1994년에 김대중은 미국 잡지 <포린 어페어스>를 보다가 싱가포르 리콴유의 대담기사를 읽었다. 서구와 다른 아시아적 가치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아시아에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포린 어페어스>는 김대중의 반박 논문을 11·12월호에 실었다. 김대중은 맹자와 동학사상을 재구성하여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아시아에도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의 반론은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에는 잘 안 알려졌지만 말이다.
    1994년 12월 한겨레에 김대중의 글이 한달 늦게 소개되었다. “국제사회에 아시아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시각을 드러냈다.” 이희호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엔 리콴유 총리의 주장에 동조하는 서구 학자들도 적지 않았거든요. 그 논문은 리콴유의 대담과 함께 미국 대학에서 교재로 쓰기도 했대요.” 훗날 독일 대통령 헤어초크가 한국을 찾았을 때도 이 논문을 인용했다. 1999년 10월 한겨레에는 리콴유가 청와대를 찾아 김대중과 직접 토론을 벌인다는 기사도 실렸다.
    “서구가 아닌 아시아에서도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김대중·이희호의 신념이었다. 이 신념을 아직도 위험하다고 여기는 지역이 아시아에, 세계에 적지 않다. 나는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한류’라는 말에 감동받지도 않지만 이런 생각은 한다. 미래의 아시아가 한국을 주목할 이유가 있다면 민주주의를 위한 이 노력 때문은 아닐까 하고. 노력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이희호는 미국 유학을 한다. 1959년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연합회 총무가 되어 여성운동가로 활약한다. 김대중과 사귀고 결혼한 것은 3년 뒤의 일이다. 당시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사진으로 추정된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이희호는 미국 유학을 한다. 1959년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연합회 총무가 되어 여성운동가로 활약한다. 김대중과 사귀고 결혼한 것은 3년 뒤의 일이다. 당시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사진으로 추정된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책을 많이 읽은 일로도 유명하다. 둘이 주고받은 편지에도 책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2003년 김대중도서관이 개관하던 날 부부의 모습을 박종식 기자가 촬영했다. 지면에 실리지 않았던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책을 많이 읽은 일로도 유명하다. 둘이 주고받은 편지에도 책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2003년 김대중도서관이 개관하던 날 부부의 모습을 박종식 기자가 촬영했다. 지면에 실리지 않았던 사진을 이번에 공개한다.

    ▶ 22화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와 관련한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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