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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인권·민주화 위해 한길 걸었다고 기억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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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87회   작성일Date 20-10-16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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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7부 동교동의 날들 5회 방북-마지막회


    이희호에게 신앙은 숱한 시련과 인고의 시간 속에서 “양심에 비춰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일생”을 지켜준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화고녀 진학과 더불어 다니기 시작한 서울 서대문 창천교회에서 요즘도 주일 예배를 올리는 이희호는 약자들의 삶과 남북통일의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에게 신앙은 숱한 시련과 인고의 시간 속에서 “양심에 비춰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일생”을 지켜준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화고녀 진학과 더불어 다니기 시작한 서울 서대문 창천교회에서 요즘도 주일 예배를 올리는 이희호는 약자들의 삶과 남북통일의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0년대 남편 김대중의 옥바라지와 민주화 운동 후원을 위해 시작한 손뜨개질은 이희호에게 마음의 평정을 도와주는 일상의 취미가 됐다. 2015년 8월5일 세번째 방북 때도 ‘사랑의 친구들’ 회원들과 함께 짠 목도리와 장갑 1만6000개를 평양 어린이들에게 선물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0년대 남편 김대중의 옥바라지와 민주화 운동 후원을 위해 시작한 손뜨개질은 이희호에게 마음의 평정을 도와주는 일상의 취미가 됐다. 2015년 8월5일 세번째 방북 때도 ‘사랑의 친구들’ 회원들과 함께 짠 목도리와 장갑 1만6000개를 평양 어린이들에게 선물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10년 3월26일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천안함’이 가라앉는 사건이 일어났다. 해군 40명이 죽고 6명이 실종됐다. 정부는 5월20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천안함 사건은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대통령 이명박은 5월24일 대북 제재 조처를 발표했다. ‘5·24 조치’는 남북 교역을 중단하고 대북 투자를 금지했다. 인도적인 목적의 사업도 정부와 협의를 거치지 않으면 할 수 없게 했다. 남북관계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희호는 6·15 공동선언 10돌을 앞두고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남북관계 악화를 걱정했다. “6·15 공동선언 이후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나요. 개성공단이 만들어지고, 남북 도로·철도가 연결되고….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이 정부에 들어와 남북관계가 파탄났어요. 냉전시대로 돌아가 버렸지요.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들이 속이 탈 거예요. 햇볕정책을 계속해야 해요. 이명박 대통령에게 6·15 공동선언을 한번 읽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해 11월23일 북한이 서해 연평도를 향해 170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군인 두 명이 죽고 민간인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휴전협정 이후 북한이 남한 영토를 공격해 민간인이 사망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12월9일 이희호는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 10돌 대토론회’에서 “남북이 즉각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연평도 폭격으로 무고한 민간인까지 희생된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북한에 촉구했다.

    2011년 12월17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돌연 사망하자 이희호는 26일 남쪽 조문단을 이끌고 두번째 방북을 했다.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의 빈소에서 이희호는 상주이자 후계자인 김정은과 손을 맞잡은 채 첫 인사를 나눴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1년 12월17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돌연 사망하자 이희호는 26일 남쪽 조문단을 이끌고 두번째 방북을 했다.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의 빈소에서 이희호는 상주이자 후계자인 김정은과 손을 맞잡은 채 첫 인사를 나눴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1년 12월17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세상을 떠났다. 북한 방송은 19일 김정일이 희천발전소 현지지도 방문 중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쇼크로 열차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발표했다. 김정일의 셋째아들인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김정은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10일 동안 장례를 치렀다. 이희호는 정부에 조문 방북 허가를 신청했다. “6·15 공동선언의 주역인 김정일 위원장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조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정부는 이희호의 조문 방북을 허용했다. 이희호 일행은 12월26일 1박2일 일정으로 육로를 통해 조문 길에 올랐다.
    이날 오후 6시20분 이희호는 김정일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에 도착해 상주 김정은을 만났다. 김정은이 이희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이희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이희호가 김정은에게 조의를 표하자 김정은이 대답했다. “멀리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희호는 조의록에 6·15 정신을 되새기는 글을 썼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서 영면하셨지만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이어 하루속히 민족통일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이희호는 백화원초대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북쪽의 배려로 2000년 6월에 머물렀던 백화원초대소 101호에 묵었지요.”
    이튿날 이희호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을 만수대의사당에서 만났다. “6·15, 10·4 선언이 계속 잘 이행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지요.” 김영남은 “6·15, 10·4 남북공동선언과 관련해 세 분(김대중·노무현·김정일)의 일이 잘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김영남은 “조의 방문을 못 오신 권양숙 여사께도 인사를 전해주기 바란다”는 말도 했다. “평양을 떠날 때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배웅을 나왔지요.” 이희호 일행은 12월27일 오후 경기도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2010년 천안함 사건 이은 교역 중단 “이 대통령 ‘6·15선언’ 한번 읽어봤으면…”
    2011년 12월 ‘김정일 조문’ 2차 방북 김영남 만나 ‘남북공동선언 이행’ 다짐
    2012년 8월 박근혜 후보 동교동 예방 “남북관계 개선 약속했지만 당선뒤…”
    2015년 8월 서해직항로 통해 3차 방북 “직접 초대한 김정은 만나길 기대했건만”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 한국이 인권국가로 서는 날 꿈꾸며 남북 서로 도우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북한은 김정은 후계 체제로 빠르게 바뀌었다. 김정은은 2012년 4월11일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되고 4월12일에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됐다. 2012년 8월20일 박근혜가 한나라당 후신인 새누리당의 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결정됐다. 박근혜는 8월22일 이희호를 방문했다. 이희호는 박근혜에게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 달라고 주문했다. 박근혜는 “남북관계가 대결국면으로 계속 가고 있는데 대화국면으로 바뀔 수 있도록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 뒤 남북관계가 더 나빠졌지요.” 한 달 뒤 문재인이 민주통합당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됐다. 범야권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안철수도 9월19일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11월23일 안철수가 후보 사퇴를 선언하고 문재인으로 야권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2012년 8월22일 이희호는 김대중평화센터로 예방한 새누리당 18대 대선후보 박근혜(오른쪽)를 맞아 ‘남북관계 개선’을 요청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이래 지금껏 남북관계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2012년 8월22일 이희호는 김대중평화센터로 예방한 새누리당 18대 대선후보 박근혜(오른쪽)를 맞아 ‘남북관계 개선’을 요청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이래 지금껏 남북관계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12월10일 민주통합당은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직원들이 인터넷에서 야당 후보를 떨어뜨리려는 여론조작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문재인과 박근혜는 투표 직전까지 접전을 벌였다. 12월19일 투표에서 박근혜가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2월21일 이희호를 방문한 문재인은 “호남에서 깜짝 놀랄 정도의 지지를 해주셨는데 제가 뜻을 이루지 못해서 호남 분들이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이희호는 문재인을 위로했다. “정권교체 열망이 컸는데 아깝게 져서 몹시 안타까웠지요.”
    2013년 1월28일 미얀마(버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가 한국을 방문했다. 미얀마 군사정부의 유화정책으로 전해 4월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였다. 아웅산 수치는 1월31일 광주를 방문해 5·18 묘역을 참배하고 5·18기념재단이 주는 광주인권상을 9년 만에 수상했다. 2월1일 아웅산 수치는 동교동을 방문했다. “남편이 1994년 아태평화재단을 만들 때부터 수치 여사를 도왔는데, 직접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2015년 10월 25년 만에 치러진 미얀마 자유총선에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이 군사정권에 맞서 압승을 거두었다. 이희호는 총선 승리를 “아웅산 수치 여사를 비롯한 버마 민주세력들의 50여년에 걸친 민주화 투쟁의 성과이며 민주개혁을 바라는 버마 국민들의 위대한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2013년 2월12일 북한이 제3차 핵실험을 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책과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에 대한 맞대응이었다. 2월25일 박근혜가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북한은 4월2일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한다고 발표하고 4월8일 개성공단 근로자를 철수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조처에 맞서 4월26일 개성공단 안 남쪽 잔류 인원을 철수시켰다. 개성공단은 2013년 9월에야 가동을 재개했다.
    2013년 5월17일 이희호의 평생 동지인 박영숙이 세상을 떠났다. “그 얼마 전에 ‘사랑의 친구들’에서 행사를 했는데, 그날 나와서 하루 종일 수고를 했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날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간다고 하더니, 암이 전신에 퍼졌대요. 두 번 병원에 찾아갔는데 두 번째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박영숙씨는 내가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총무 할 적에 대학생부 간사였어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때 안병무 박사(박영숙 남편)도 잡혀 들어가서 우리가 함께 밖에서 싸웠지요. 내가 청와대에 있을 때 ‘사랑의 친구들’ 만드는 일도 함께 했고 한국여성재단을 세우는 일도 앞장서 했지요. 항상 나와 함께했는데 그렇게 가버리니 참으로 허망했어요.”
    2013년 6월15일 목포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옥중 편지’를 포함해 4830여점의 자료가 전시됐다. 전시 공간에 김대중과 이희호의 밀랍인형이 세워져 방문객을 맞았다. 7월3일 서울고등법원이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김대중과 문익환을 포함한 16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희호는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37년 만에 무죄를 받아 감개무량합니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하늘나라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앞으로 누구든 죄 없이 수감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2013년 5월17일 이희호는 평생지기이자 민주화·여성운동 동지인 박영숙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함께 참가했던 ‘사랑의 친구들’ 봉사활동을 끝으로 돌연 별세한 박영숙의 빈소에 이희호는 조의 화환을 마지막으로 선물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3년 5월17일 이희호는 평생지기이자 민주화·여성운동 동지인 박영숙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함께 참가했던 ‘사랑의 친구들’ 봉사활동을 끝으로 돌연 별세한 박영숙의 빈소에 이희호는 조의 화환을 마지막으로 선물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4년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했다. 배에 타고 있던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해 304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그 어린 학생들이 왜 그렇게 죽어가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일이었어요.” 박근혜 정부를 향한 국민의 비난이 빗발쳤다. 세월호 사건은 국민의 뇌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2014년 10월28일 이희호는 청와대를 방문해 대통령 박근혜를 만났다. “북한 어린이 돕기 활동을 위해 북한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받아들여 주었지요.” 2014년 12월24일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김정은이 이희호에게 친서를 보냈다. 김정은은 친서에서 “다음에 좋은 계절에 여사께서 꼭 평양을 방문하여 휴식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되시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김정일 동지께서는 생전에 여사께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족과 통일을 위한 길에 모든 것을 다 바쳐온 데 대해 자주 회고하셨다”는 말도 했다.
    2015년 8월5일 이희호는 서해 직항로를 통해 북한을 3박4일 일정으로 방문했다. 세 번째 방북이었다. 이날 아침 10시 김포공항에서 이희호는 방북하는 심정을 수행단장 김성재를 통해 밝혔다. “우리 민족이 분단 70년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6·15 정신으로 화해협력하면서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양에 갑니다.” 이희호의 방북에는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 백낙청, ‘사랑의 친구들’ 초대 운영위원장 윤장순을 포함한 18명이 함께했다. 만 93살의 노구를 태운 전세기는 평양으로 향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우리를 직접 초대했기 때문에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지요.”
    이희호 일행이 탄 비행기는 오전 11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맹경일이 공항에 나와 이희호 일행을 맞았다. “맹경일 부위원장이 마지막까지 우리를 수행했어요.” 이희호는 다시 백화원초대소에 묵었다. 맹경일은 김정은이 “이희호 여사는 고결한 분이기 때문에 정성껏 모시고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해드리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희호는 평양산원 부설 유선종양연구소와 옥류아동병원을 방문했다. 첫날 저녁 만찬이 열렸다. 김정은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면 ‘6·15 남북공동선언을 서로 지켜 가도록 하자’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만나지 못하니까 만찬 자리에서 맹경일 부위원장에게 말했어요. ‘아니, 김정은 위원장이 초청장을 보내서 왔는데, 나오지도 않는다면 뭐가 되느냐’고요. 그랬더니 그이가 밖으로 나가 한참 동안 전화를 하고 왔는데, 난감한 표정만 지었어요. 그이한테 ‘6·15 공동선언을 잘 지키도록 하자’는 말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했지요.”
    이튿날 이희호 일행은 평양에 있는 애육원·육아원·양로원을 방문했다. “북한을 방문한 1차 목적이 북한 어린이들에게 ‘사랑의 친구들’에서 마련한 물품을 전달하는 것이었거든요. ‘사랑의 친구들’에서 짠 모자와 장갑이 1만6000개 정도 됐어요. 박영숙씨가 살아 있을 적에도 짰고, 나도 직접 짰고요. 그걸 전해주었지요.” 이희호 일행은 이날 오후 묘향산으로 향했다. 북쪽에서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구급차 한 대를 포함해 13대의 차량으로 이희호 일행의 이동을 도왔다. 이희호는 셋째 날 묘향산 만폭동과 보현사를 관람했다. 8월8일 이희호는 3박4일 방북 일정을 마치고 평양을 떠났다. “마지막 오찬 때까지 김정은 위원장이 오기를 기대했는데 끝내 만나지 못했지요.”
    이희호는 낮 12시 김포공항에 도착해 성명을 읽었다. “민간인 신분인 저는 이번 방북에서 어떠한 공식 업무도 부여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6·15 정신을 기리고 키우는 데 일조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모든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특히 평양에서 애육원·육아원을 방문하고 해맑은 어린이들의 손을 잡으면서 다음 세대에 분단의 아픔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이날 “우리 인민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원천리 평양을 방문한 이희호 여사에게서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위해 애쓰는 진심을 알 수 있었고 여생을 통일의 길에 바치려는 그의 남다른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밝혔다.

    2015년 8월5일 이희호는 서해 직항로를 통해 막힌 남북관계를 뚫어보고자 93살 노구에 세번째 방북을 했다. 하지만 3박4일 일정 내내 기다렸던 김정은 면담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5년 8월5일 이희호는 서해 직항로를 통해 막힌 남북관계를 뚫어보고자 93살 노구에 세번째 방북을 했다. 하지만 3박4일 일정 내내 기다렸던 김정은 면담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6년 1월6일 북한이 제4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1월26일 이희호는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다 넘어져 골반뼈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했다. 급히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이희호는 남북의 대치가 격해질 때마다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2월7일 북한이 광명성 4호를 실은 로켓을 발사했다. 유엔과 미국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규탄했다. 박근혜 정부는 2월10일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했다. 격랑 속에서도 지켜온 남북 협력의 상징이 문을 닫았다. 이희호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4월13일 제20대 총선이 치러졌다. 여당인 새누리당이 참패하고 야권이 대승을 거두었다. 10월 최순실 사태가 터졌다. 박근혜 정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희호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았다. 20세기를 관통해 21세기에 이른 100년 가까운 삶이었다. “내 양심에 비추어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희호는 자신이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이희호는 한국이 인권국가로 반듯하게 서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다. “우리나라가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나라로 세계인에게 인정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같이 잘사는 나라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희호는 매일 기도했다. “남과 북이 서로 사랑하고 도와가며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끝>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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