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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 총회서 여성으로 첫 기조연설해 영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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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69회   작성일Date 20-10-1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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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6부 청와대 시간- 8회 여성부 탄생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조직법 개정을 추진해 2001년 1월29일 정부 사상 첫 여성부를 신설했다. 이듬해 여성부 출범 1돌 기념식에 이희호와 함께 참석한 김대중이 격려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조직법 개정을 추진해 2001년 1월29일 정부 사상 첫 여성부를 신설했다. 이듬해 여성부 출범 1돌 기념식에 이희호와 함께 참석한 김대중이 격려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1년 1월29일 정부조직법이 바뀌었다. 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여성부가 들어섰다. 새천년민주당 의원 한명숙이 장관으로 임명됐다. “여성 권익 향상은 내 오랜 소망이었어요. 남편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여성 지위 향상에 노력을 많이 했지요. 정부 출범 때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 특별위원회를 발전시켜 여성부를 세웠어요. 남편은 양성평등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을 앞서갔어요. 내가 뭐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요. 1998년엔 가정폭력방지법을 만들었고 1999년엔 남녀차별금지법을 시행했지요. 여성부가 출범하던 날 남편이 ‘여성부 탄생을 축하하지만 빨리 없어질수록 좋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에요. 양성평등이 실현되면 사라져야 할 부서니까요.”

    여성부 신설과 함께 교육부·행자부·법무부·농림부를 포함한 정부의 여섯 부처에 여성정책 담당관실도 설치됐다. “우리가 청와대에 있는 동안 정부와 사회에서 여성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었지요. 우리가 들어가기 전 50년 동안 청와대에 여성 비서관이 한 명뿐이었어요.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그 수가 열 명으로 불었지요. 여성 장관도 네 명 배출했고요.” 이희호가 청와대에 있던 동안 육군 여성 장교가 처음으로 장성이 됐다. 경찰에서도 여성 총경이 탄생했다. “어느 해인가(2000년)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 갔는데, 여학생이 생도대장이었어요. 구령하는 모습을 보고 세상의 변화를 느꼈지요.” 이희호가 가장 아쉽게 생각한 건 여성 국무총리 탄생 무산이었다. “장상 이화여대 총장이 2002년에 총리 후보로 지명됐는데 시어머니가 사소한 잘못을 한 것 때문에 야당이 부결시켰어요. 그 뒤 ‘참여정부’에서 한명숙 장관이 첫 여성 총리에 기용돼서 다행이라고 느꼈지요.”
    2001년 1월 전국의 모든 중학교에 의무교육이 실시됐다. “남편은 교육 분야에 민주화·정보화·교육복지 세 가지 목표가 있었어요. 교육 민주화 조처로 1999년 1월 교직원노조를 합법화했고 국립대 총장 직선제도 받아들였지요. 또 모든 학교와 교실을 인터넷으로 연결해 교육 정보화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완성했어요. 중고등학교 학교급식을 시행하고 빈곤가정 학생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일도 했지요. ‘국민의 정부’가 마지막까지 이루어내지 못한 것이 대학 시간강사 처우 개선이었어요. 남편은 그걸 몹시 안타까워했지요. 사회가 지식인을 너무 홀대한다고요.”
    2월25일 세종로 정부청사와 과천청사를 연결하는 사상 첫 영상국무회의가 열렸다. “남편은 취임식 때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정보 강국으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만큼은 지켰지요.” 1999년 37만 가구였던 인터넷 가입 가구가 2002년 10월 1000만 가구를 넘어섰다. 인터넷 사용 인구도 1997년 말 163만 명에서 2002년 말에는 2700만 명으로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1년 말 기준으로 한국의 초고속인터넷 보급률이 회원국 중 1위라고 발표했다. 미국보다 4배나 많은 100명당 17.16명이었다.

    2001년 1월 정부조직법 바꿔 여성부 신설 한명숙 초대장관 등 여성 공직 진출 급증 “첫 여성 총리 탄생 무산이 가장 아쉬웠죠”
    2001년 3월 미국 방문 김대중 ‘디스’ 부시 이듬해 2월 도라산역 시찰한 뒤 “존경한다”
    2002년 5월 유엔아동특별총회 한국대표로 뉴욕 유엔본부서 임시의장 맡아 회의 주재 “어린이 살기 좋은 세상이 인류 미래” 호소

    2001년 3월6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미국을 방문했다. 3월8일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신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의 정책 기조는 ‘클린턴이 해놓은 것은 모두 부정한다’였다. 네오콘(신보수) 강경파인 부통령 딕 체니와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가 백악관의 대외 정책을 좌지우지했다. 미사일방어(MD)시스템 개발 명분을 세우려고 북한의 위협을 들먹였다. 김대중과 부시의 정상회담은 순조롭지 못했다.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김대중의 말을 가로채는가 하면 한국 대통령을 ‘이 사람’(디스 맨)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당시 국무부 부장관이던 리처드 아미티지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지식함과 무지, 외교력 결여, 한국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빚어진 실수였다. 준비되지 않고 지독하게 교만한 텍사스 출신 카우보이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만났던 것이다. 회담은 거기서부터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김대중은 모욕감을 느꼈다. “회담이 끝난 뒤 남편이 몹시 불쾌해했어요. 우리 국민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지요.” 이튿날 김대중은 온건 보수파인 부시의 아버지(조지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전임 대통령 빌 클린턴에게도 전화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인 3월12일 남아공 대통령을 지낸 넬슨 만델라가 청와대를 방문했다. “만델라 대통령과 남편이 직접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 전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간접 대화를 많이 했기 때문에 사실상 구면이나 다름없었지요. 남편과 만델라 대통령은 모두 70대에 대통령이 됐고 노벨평화상도 비슷한 나이에 받았어요.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았지요.” 김대중과 만델라는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대중은 재임 중에 교도소 인권 개선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남편이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했기 때문에 교도소 문제를 잘 알고 있었어요.” 김대중은 법무부 교정국장을 검사가 맡아오던 관행을 바꾸어 교도관 출신이 맡도록 했다. 소년원도 혁신했다. “전국의 소년원 12곳에 멀티미디어 어학실과 컴퓨터 교실을 설치하고 실용영어 컴퓨터 교육과 직업훈련을 시켰어요. 스키 캠프 같은 개방적인 교육도 실시했지요.”

    2000년 7월 이희호는 소년원생들을 처음으로 청와대에 초청했다. 사진은 2001년 3월 서울 대학로 학전그린 소극장에서 <지하철 1호선>을 함께 관람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7월 이희호는 소년원생들을 처음으로 청와대에 초청했다. 사진은 2001년 3월 서울 대학로 학전그린 소극장에서 <지하철 1호선>을 함께 관람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는 청소년 재소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2000년 7월 소년원생들이 처음으로 청와대를 관람했다. “소년원생들을 부르겠다고 하자 청와대 안에서 반대가 많았어요. 어떻게 범죄자가 청와대에 올 수 있느냐고요. 그래서 지금 대통령도 한때 사형수였다고 설득했지요. 소년원생들과 함께 청와대 경내도 관람하고 영빈관에서 다과회도 하고 송승환씨가 연출한 <난타>도 함께 관람했지요. 소년원생들이 돌아가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중 한 소년원생이 기억에 남아 직접 청주소년원에 찾아가 만나기도 했지요. 그 아이에게 오히라 미쓰요가 쓴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를 선물했어요. 비행 소녀였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변호사가 된 여성의 이야기지요.”
    이희호는 틈이 날 때마다 소년원생들을 만났다. “소년원생들이 뮤지컬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2001년 3월에 소년원생 70명과 장애인 30명을 초대해 대학로 학전그린 소극장에서 김민기씨가 만든 <지하철 1호선>을 함께 봤지요. 그 뒤에도 예술의전당에서 뮤지컬 <명성황후>, 세종문화회관에서 프랑스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소년원생들과 함께 보았지요. 청와대를 나올 때까지 전국의 모든 소년원생을 만나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 이루지는 못했어요. 그 청소년들에게 ‘사회가 너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용기를 내서 희망을 키우라’는 뜻을 전해주고 싶었지요.”
    2001년 3월21일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이 86살로 세상을 떠났다.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튼 ‘소떼 방북’의 주인공이었다. 북한은 조문단을 보내 정주영의 죽음을 애도했다. 3월22일에는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했다. 동북아 물류의 중심축이 위용을 드러냈다. “남편은 인천공항에 이어 경의선까지 복원되면 우리나라가 물류의 중심국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기대했지요.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를 보는 것이 소망이었어요.”
    2001년 6월 말 이희호는 ‘한국방문의 해’ 명예위원장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저녁에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한-중 우호의 밤’이 열렸어요. 우리 쪽 70명, 중국 쪽 150명이 모여 만찬을 함께했지요. 내 서간집 <내일을 위한 기도> 중국어판이 그 무렵 나와서 그날 출간 기념회도 열렸어요.” 이희호는 책의 인세를 전부 중국 오지 어린이 돕기 기금으로 냈다.
    2001년 8월23일 국제통화기금(IMF) 차입금 195억 달러 중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1억4000만 달러가 상환됐다. “이날로 ‘경제신탁통치’에서 벗어났지요. 아이엠에프와 약속한 2004년보다 3년 앞당겨서 빚을 청산한 거였지요.” 그해 9월15일 외환보유액이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한국은 세계 5위의 외환보유국이 됐다. 이듬해에는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에이(A)등급으로 회복시켰다. 한국은 투자 부적격 국가라는 불명예를 벗었다.
    2001년 8월 ‘만경대 방명록’ 사건이 일어났다.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한 동국대 교수 강정구가 김일성 생가로 알려진 만경대를 방문해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고 쓴 것이 화근이었다. 야당은 방북 허가를 내준 책임을 물어 통일부 장관 임동원의 교체를 요구했다. 공동 여당인 자민련도 야당과 발을 맞췄다. “남편은 임동원 장관을 교체할 수는 없다고 했지요. 자민련에 협조를 구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자민련의 동참으로 임동원의 해임 건의안이 가결됐다. 민주당-자민련 공동정권이 3년 7개월 만에 무너졌다. 정국이 1여 2야로 재편되고 여당은 소수당이 됐다.
    2001년 9월11일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납치한 비행기 두 대가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받았다. 쌍둥이 건물이 무너지고 3000명이 사망하는 전대미문의 테러 사건이었다. “그날 밤 저녁 식사 뒤에 관저에서 쉬고 있는데, 비서관이 연락을 했어요. <시엔엔> 방송에 긴급뉴스가 나오는데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했다는 거예요. 바로 텔레비전을 켰지요. 쌍둥이 빌딩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어요.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어려웠어요. 남편은 이 사건으로 한반도에까지 불똥이 튈까봐 걱정이 많았지요.” 조지 부시의 미국은 10월7일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하고 있다는 핑계를 대고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모든 나라들에게 동참하라고 촉구했어요. 세계를 ‘친구 아니면 적’으로 갈랐지요.”
    2001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는 ‘국민의 정부’ 100대 과제 가운데 하나였어요. 그런데 정부 부처와 시민단체의 이견 때문에 미루어지다가 2001년에야 법을 제정하고 인권위원회를 출범시켰지요.” 초대 인권위원장은 변호사 김창국이 맡았다. “남편은 인권 관련 법안 통과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분들 덕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우리가 청와대에 들어간 첫해부터 유가협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422일이나 천막농성을 벌이기도 했지요.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과 민주화운동보상법을 통과시켜 달라고요. 이소선 여사가 청와대에 와서 남편의 소매를 붙잡고 울먹이기도 했어요. 1999년 말에 여야 합의로 제주4·3특별법, 기초생활보장법과 함께 국회 마지막 법안으로 통과되었지요.”
    2001년 11월8일 김대중은 새천년민주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그해 12월 말 아태평화재단이 동교동 김대중·이희호의 집 바로 옆에 들어섰다. “건물 터는 우리를 수십 년 동안 감시하던 집이 있던 자리였어요. 사찰하는 데 쓰던 집을 사들여 평화재단을 만든 거지요. 건축비가 부족해 일부를 융자받았어요. 동교동 우리 집도 너무 낡아서 그때 새로 짓기로 했지요.”

    2001년 3월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 때 김대중을 ‘디스 맨’으로 홀대했던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2002년 2월20일 한국을 방문해 함께 도라산역을 시찰한 뒤 햇볕정책 지지와 더불어 김대중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1년 3월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 때 김대중을 ‘디스 맨’으로 홀대했던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2002년 2월20일 한국을 방문해 함께 도라산역을 시찰한 뒤 햇볕정책 지지와 더불어 김대중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2년 1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연두교서에서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다. 북한과 미국 사이 긴장의 파고가 높아졌다. 2월20일 부시가 한국을 방문했다. 부시는 1년 전의 오만한 태도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김대중은 정상회담 1시간40분 동안 부시를 설득했다. 회담이 끝난 뒤 부시는 김대중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합니다. 미국은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습니다.” 한·미 정상은 휴전선 앞 도라산역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부시에게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는 현장을 보여주었다. 부시는 철도 침목에 기념 서명을 하고 “우리는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도라산역을 둘러보고 나서 부시 대통령의 태도가 확 달라졌어요. 남편을 존경한다는 말도 했지요.”

    2002년 5월 이희호는 김대중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5월8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총회에서 의장국 대표로 임시의장을 맡은 이희호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기조연설을 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2년 5월 이희호는 김대중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5월8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총회에서 의장국 대표로 임시의장을 맡은 이희호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기조연설을 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2년 5월6일 이희호는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그해 우리나라가 유엔 의장국이었어요. 남편이 참석해야 하는데, 의료진이 대통령의 장거리 여행을 만류했어요. 그때 남편이 여러 문제로 건강이 좋지 않았거든요. 외교안보수석실에서 대통령보다 내가 아동총회에 어울린다고 해서 대한민국 정부대표단 수석대표를 맡았지요. 내 임무는 임시의장으로서 영어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하는 것이었어요.” 유엔 아동특별총회는 1990년 아동을 위한 세계정상회의에서 결의한 아동의 생존·보호·발달에 관한 세계선언과 행동계획에 대한 지난 10년의 실적을 평가하고 향후 10년의 행동 방안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5월8일 이희호는 뉴욕의 유엔본부 총회 의장석에 앉았다. “회의장에 들어서니 오른쪽에 코피 아난 사무총장, 왼쪽에 사무차장이 있었어요. 나는 의장석에 앉아 9시에 개회 선언을 하고 의장이 선출될 때까지 회의를 주재했지요.”
    이어 이희호는 아동특별총회 기조연설을 했다. “어린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곧 평화롭고 번영된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빈곤과 학대, 영양실조와 에이즈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희호는 “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나서자”고 촉구했다. 이튿날 아동서약서 전달식이 열렸다. “유엔본부 잔디밭에서 아동서약서 전달식을 했어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지켜봤어요. 남아공 만델라 전 대통령 부부도 그 자리에 참석했지요.” 이희호에게 유엔특별총회는 뜻깊은 행사였다. “유엔총회에서 임시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한 것은 여성으로서는 내가 처음이었다고 해요. 영광스러운 일이었지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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