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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위원장 첫인상은 풍문과 달리 명랑해 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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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325회   작성일Date 20-10-1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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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평전] 제6부 청와대 시간 - 5회 남북정상회담 상

    2000년 봄 두차례 김정일 만난 임동원
    “연장자 깍듯이 예우” 보고에 ‘안심’

    6월13일 반세기 만에 대통령 첫 ‘방북’
    “정상회담 일정 불확실해 모두들 긴장”

    1시간 남짓 만에 평양 순안공항 도착
    “남북화해 주장탓 박해받은 서러움 울컥”

    남쪽 언론 ‘김 대통령 말이 적다’ 지적
    “남편은 경청하며 김 위원장 탐색했죠”


    2000년 4월10일 오전 10시 통일부 장관 박재규와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이 남북의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발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 방문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시민단체들과 경제단체들이 환영 성명을 냈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특별성명을 직접 발표해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환영했다. “남편이 취임 후 일관되게 추진한 햇볕정책이 북한의 의심을 마침내 녹였지요.”

    남북정상회담 합의는 끈기 있는 노력 끝에 성사된 것이었다. 이해 2월9일 김대중은 일본 <도쿄방송>과 회견하면서 김정일을 이렇게 평가했다. “지도자로서 판단력과 식견을 갖췄다고 봅니다. 남북관계를 풀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화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김대중은 박지원을 특사로 임명했다. 박지원은 3월8일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과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비밀리에 만났다. 다음날 독일 방문 중이던 김대중은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촉구하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4월8일 베이징에서 열린 박지원과 송호경의 네 번째 비밀접촉에서 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됐다. “남편은 남북정상회담을 치밀하고 꼼꼼하게 준비했지요. 회담 상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쓴 책을 모두 찾아 읽었어요. 황장엽씨가 쓴 책도 읽었는데 하나같이 부정적인 평가뿐이었어요. 그 책들의 내용이 다 사실이라면 그런 사람과 어떻게 정상회담을 할 수 있겠냐고 탄식했지요.”
    김대중은 국가정보원장 임동원을 두 차례 평양에 파견했다. 김정일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고 남북정상회담 초안을 사전에 협의하는 것이 임무였다. 6월3일 두 번째로 평양에 간 임동원은 김정일을 만난 뒤 서울로 돌아와 김대중에게 보고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대통령님의 민주화 투쟁과 고난의 삶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통령님을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양에 오시면 존경하는 어른으로 품위를 높여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임동원은 김정일이 어둡고 괴팍한 성격이라는 인상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말하기를 즐겼습니다. 두뇌가 명석하고 판단력이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랑한 편이고 유머 감각도 대단했습니다.” 임동원은 김정일이 “연장자를 깍듯이 예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도 했다. “남편은 임동원 원장의 설명을 듣고 나서 좀 안심을 했어요. 그 뒤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상정하고 실제처럼 두 차례 예행연습까지 했지요.” 6월10일 북한에서 갑자기 평양 방문을 하루 연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55년을 기다렸는데 하루쯤 더 기다릴 수 있지 않냐’는 심정으로 받아들였지요.”
    2000년 6월13일, 북녘땅을 밟는 날이었다. 이날 아침 김대중과 이희호는 청와대를 출발해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환송식이 열렸다. 어린이합창단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김대중은 출발성명을 발표했다. “저의 이번 평양길이 평화와 화해의 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남북 7000만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냉전 종식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일행은 긴장 속에 비행기에 올랐다. “남편도 긴장하고 있었어요. 분단 후 처음으로 열리는 정상회담이고, 공동선언도 합의가 안 된 상태였어요. 북쪽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를 요구했는데, 그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요.” 비행기는 9시15분 서울공항을 떠났다.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을 태운 공군 1호기는 북위 38도선을 넘어 9시45분 북한 영공에 진입했다. 오른쪽 아래로 백령도와 옹진반도 장산곶이 보였다. 10시27분 비행기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분단 반세기의 단절을 넘는 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이희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걸어오고 있었어요.” 초청국의 원수가 공항에서 직접 영접하지 않는다는 외교 관례로 보면 파격적인 출현이었다. “놀랐지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공항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북한의 특성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거든요.”
    트랩으로 나가기 전 이희호는 남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전날까지도 밤잠을 못 자고 노심초사했는데, 남편의 표정이 아주 고요했어요.” 김대중과 이희호는 트랩 위에서 북녘땅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의 심정을 김대중은 자서전에 이렇게 밝혔다. “북한의 조국 강산을 처음 보는 심정은 감개무량했다. 울컥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꽃술을 흔드는 군중이 보이고 그들이 외치는 함성이 들렸다. 저 아래 김정일 위원장이 있었다. 인민복을 입은 김정일 위원장, 그가 마중을 나왔다. 트랩을 내려갔다. 북녘땅을 처음 밟았다. 무릎을 꿇고 그 땅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다리가 불편해서 그리할 수 없었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서로 다가서며 손을 맞잡았다. 거의 동시에 같은 인사말이 나왔다. “반갑습니다.” 세계 언론이 그 순간을 주시했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는 외신기자 500여명을 포함한 취재기자 1200여명이 일제히 일어나 손뼉을 쳤다.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김정일은 이희호에게도 인사했다. “나에게도 ‘반갑습니다’ 하고 밝게 인사를 했지요. 참을성 없고 신경질적이라던 풍문과는 아주 다른 인상이었어요. 명랑해 보였어요.”
    영접행사가 이어졌다. 의장대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보고했다. “조선인민군 육해공군 명예의장대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와 함께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하여 정렬하였습니다.” 김정일은 세심했다. “의장대를 사열하는데 내가 약간 뒤에 있었거든요. 김정일 위원장이 나를 대통령 옆으로 안내해 주었지요.” 의장대 사열이 끝난 뒤 김정일은 북쪽 인사들을 소개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 내각 총리 홍성남, 노동당 간부 담당 비서 김국태, 대남 담당 비서 김용순,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태복, 외교부 제1부부장 강석주,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안경호였다.
    “영접행사가 끝나고 남편을 뒤따라 검은색 승용차로 가는데 북쪽 안내자가 나를 뒤차로 안내했어요. 잠시 어리둥절했지요.” 김정일이 김대중을 오른쪽 뒷좌석으로 안내한 뒤 뒤로 돌아서 뒷좌석 왼쪽에 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남편과 함께 앞차에 타고 나는 뒤차에 탔어요. 내 옆자리에는 박선옥 아태평화위원회 국제부장이 동승했고요.”
    차에 탄 김대중과 김정일은 연도에 늘어선 수십만 평양시민의 함성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정일이 물었다. “북에 오는데 무섭지 않았습니까? 무서운데 어떻게 왔습니까?” 김정일의 말이 이어졌다. “저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에는 아주 잘 모시겠습니다. 편안히 계십시오.” 김대중도 김정일에게 말했다. “남북 국민과 세계가 관심을 갖는 회담에서 민족에 희망을 주는 결과가 있었으면 합니다.”
    2000년 6월13~15일 첫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방북 일정 동안 이희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탐색했다. 이틀째인 6월14일 저녁 목란관에서 열린 환영만찬 행사에서 김 위원장과 건배를 하는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0년 6월13~15일 첫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방북 일정 동안 이희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탐색했다. 이틀째인 6월14일 저녁 목란관에서 열린 환영만찬 행사에서 김 위원장과 건배를 하는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과 김정일이 탄 차는 평양 시내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 김대중은 차에서 내려 학생에게서 꽃다발을 받았다. 평양시민들과 악수를 하기도 했다. 김대중이 탄 차는 천리마거리, 조선혁명박물관, 만수대 언덕, 모란봉 천리마 동상, 개선문, 김일성종합대학교, 금수산기념궁전을 지나 백화원에 멈췄다. 이희호의 차는 그 뒤를 따랐다. “도로 양쪽에 빨간 꽃술을 흔드는 여성들이 빽빽했어요. 함성이 말로 할 수 없이 컸지요. 창밖을 보느라고 옆에 있던 박선옥 국제부장과 무슨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김정일’을 연호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간혹 ‘김대중’을 외치는 소리도 들렸지요.”
    이희호의 차가 백화원 영빈관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김정일 위원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먼저 들어가도록 안내해 주었지요.” 김대중과 이희호는 백화원 로비에서 김정일과 기념사진을 찍은 뒤 접견실로 옮겼다. “김정일 위원장은 말하는 것이 거침이 없고 자연스러웠어요. 좌중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장관과 수행원들까지 배려했어요.”
    접견실의 환담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아침에 계란 반숙을 절반만 드시고 떠나셨다고 하셨는데 구경 오시는데 왜 아침 식사를 적게 하셨습니까?” 김정일의 물음에 김대중은 농담으로 답했다. “평양에 오면 식사를 잘할 줄 알고 그랬습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방북을 지지하고 환영하는지 똑똑히 보여드리겠습니다. 장관들도 김 대통령과 동참해 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고 우리는 같은 조선 민족입니다.” 김정일은 김일성 이야기도 했다. “주석님께서 생존했다면 주석님이 대통령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서거 전까지 그게 소원이었습니다.”
    이희호는 김정일을 찬찬히 관찰했다. “정확하고 풍부한 어휘로 말을 쏟아냈어요. 유머 감각도 있고요. ‘저 표현력을 어떻게 지금까지 감출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 북한에는 선거가 없지’ 하고 자문자답하면서 혼자 웃음을 삼켰지요.” 1992년 북한군 창설 60돌 기념식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고 단 한마디 한 것이 이날 이전까지 국제사회에 알려진 김정일 육성의 전부였다. 이희호의 가슴에 문득 서러움이 번졌다. “만감이 교차했지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올 수 있는데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기까지 반세기나 걸렸잖아요. 또 우리는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박해를 받았고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서러운 마음이 들었지요.”

    2000년 6월13일 김대중·이희호 대통령 부부는 서해 직항로로 휴전선을 넘어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 북한 땅을 밟았다. 이날 오전 10시27분 평양 순안공항에 나와 직접 일행을 영접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의장대 사열을 하며 뒤편에 서 있던 이희호를 앞쪽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6월13일 김대중·이희호 대통령 부부는 서해 직항로로 휴전선을 넘어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 북한 땅을 밟았다. 이날 오전 10시27분 평양 순안공항에 나와 직접 일행을 영접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의장대 사열을 하며 뒤편에 서 있던 이희호를 앞쪽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접견실 환담을 마친 김대중과 이희호는 숙소 응접실에서 점심을 들었다. “텔레비전을 켜보니 남쪽 방송이 나와요. 순안공항에서 남북 정상이 상봉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었어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방으로 배달된 점심을 먹었지요. 닭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평양식 온반이었는데, 담백하고 정갈한 맛이 일품이었지요.”
    오후 3시에 김대중은 만수대 의사당에서 북한의 국가수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을 만났다. 김영남은 축하 인사에서 김대중의 민주화 투쟁 경력을 이야기했다. “김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을 잘 알고 있습니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납치되었을 때 북남관계를 중지시켰습니다. 같은 겨레로서 꼭 구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인민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이 그런 조처를 했다는 것을 김대중은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이날 저녁 김영남이 주최한 만찬이 열렸다. “만찬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켜니 남쪽의 열기가 대단했어요.” 평양에서 기자단이 보내는 현장 장면을 서울에서 편집할 틈도 없이 그대로 방송하고 있었다. 공보수석 박준영이 ‘우리 대통령이 너무 말씀을 안 하신다’는 기자들의 반응을 전했다. “남편은 김정일 위원장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가 김 위원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말을 아끼고 상대편 말을 더 많이 듣는다고 했지요. 김 위원장이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는 것이었어요.”

    2000년 6월14일 첫 방북 이틀째 이희호는 수예연구소·평양조산원·옥류관 등등 평양 시내 곳곳을 둘러봤다.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을 평일 내내 맡아주는 기숙시설인 창광유치원에 들른 이희호는 놀이방 아이들과 손을 잡고 잠시 춤을 추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6월14일 첫 방북 이틀째 이희호는 수예연구소·평양조산원·옥류관 등등 평양 시내 곳곳을 둘러봤다.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을 평일 내내 맡아주는 기숙시설인 창광유치원에 들른 이희호는 놀이방 아이들과 손을 잡고 잠시 춤을 추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평양 방문 이틀째인 6월14일 오전 이희호는 창광유치원과 수예연구소를 방문했다. “창광유치원은 맞벌이 부부를 위해 설립한 곳이래요. 놀이방에서 아이들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돌았어요. 식량난 때문인지 아이들이 잘 먹지를 못해서 말랐어요. 마음이 아팠지요.” 이희호와 김대중은 평양 옥류관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다. 오후에 이희호는 평양조산원을 방문했다. “1981년에 세계 최대 규모로 지은 여성 전문 병원이었어요. 그런데 건물은 큰데 의료기기가 부족해 휑한 느낌이 들었어요. 임산부들도 많지 않고요. 남쪽에서 기증받아 가져간 최첨단 초음파 영상 진단기를 전해주었지요.”
    2000년 6월14일 이희호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이화여고 시절 은사인 김지한(오른쪽) 선생과 60년 만에 상봉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0년 6월14일 이희호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이화여고 시절 은사인 김지한(오른쪽) 선생과 60년 만에 상봉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는 이화고등여학교 시절의 은사도 만났다. “방북하기 전에 북쪽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써내라고 해서 친구들 이름을 여럿 써냈어요. 일제강점기 시절엔 북쪽이 먼저 개화돼서 이화고녀에 이북 여학생들이 많이 유학 왔거든요. 그런데 친구들은 못 만나고 이화고녀 시절 수학을 가르쳐주신 김지한 선생님만 만났어요. 여선생님이에요. 85살이나 됐는데 따님과 함께 나왔어요. 내가 그 시절에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날 기억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세가 많이 드셔서인지 나를 알아본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헤어질 때 여름 한복을 선물로 드렸지요.”
    이어 남북 여성좌담회가 열렸다. 이희호는 이화여대 총장 장상, 청와대 제2부속실장 성인숙과 함께 참석했다. 북쪽에서는 조선여성협회 회장 홍선옥, 교원대 학장 남선희, 인민배우 김정화를 비롯해 일곱 명이 나왔다. “나는 정신대(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남북이 공동으로 대처하자고 제의했지요.” 좌담회가 끝난 뒤 이희호는 오후 5시쯤 숙소로 돌아왔다. “남편은 그때까지도 계속 정상회담을 하고 있었어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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