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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이 박정희를 증인 신청하자…“여기에 진짜 대통령이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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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687회   작성일Date 20-10-0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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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10회 3·1 민주구국선언 하
     
    1976년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계기로 양심범가족협의회를 결성한 구속자 부인들은 공판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평화 시위를 벌이며 ‘민주 투사’로 거듭났다. 사진은 76년 5월4일 재판이 시작된 이후 구속자 부인들이 변호인단에 식사를 대접하고자 서울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택에 모인 날이다. 앞줄 왼쪽부터 김석중·박순리·박용길·이우정·이희호·고귀손, 둘째 줄 문혜림(문동환 부인)·이태영·박영숙·이종옥, 맨 뒷줄 함석헌·윤보선·공덕귀·정일형.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이종옥씨 제공
    1976년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계기로 양심범가족협의회를 결성한 구속자 부인들은 공판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평화 시위를 벌이며 ‘민주 투사’로 거듭났다. 사진은 76년 5월4일 재판이 시작된 이후 구속자 부인들이 변호인단에 식사를 대접하고자 서울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택에 모인 날이다. 앞줄 왼쪽부터 김석중·박순리·박용길·이우정·이희호·고귀손, 둘째 줄 문혜림(문동환 부인)·이태영·박영숙·이종옥, 맨 뒷줄 함석헌·윤보선·공덕귀·정일형.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이종옥씨 제공

    박정희 정권은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구속자들의 면회를 막다가 1976년 3월29일에야 변호사 접견을 허락했다. 그러나 가족 면회는 계속 금지했다. 남편을 감옥에 빼앗긴 부인들이 부활절 전야인 4월17일 목사 김상근이 시무하던 수도교회에 모여 밤샘기도를 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새벽에 사직터널과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서울구치소 뒤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부인들은 구치소에 갇힌 사람들을 향해 ‘부활의 찬송’을 목청껏 불렀다. 두 뺨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공판이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되자 방청 거부하고 거리로 나선 가족들
    “‘검정 테이프’ 십자가를 입에 붙이자” 이희호 제안으로 침묵시위를 했다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구치소의 교도관들과 근처 파출소 경찰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왔어요. 구치소 뒤에서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몇몇은 재빨리 샛길로 빠져나갔는데 김석중(이문영 부인)씨, 박영숙(안병무 부인)씨와 나는 경찰을 따돌리지 못하고 파출소로 연행되고 다시 서대문경찰서로 끌려갔어요. 거기서 다시는 금지구역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경고를 받고 풀려났지요.” 그러나 이희호와 구속자 부인들은 그 뒤로도 몇 해 동안 부활절 새벽이면 서대문 구치소 뒷산에 올라 갇힌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불렀다.
    3·1 사건 구속자들의 첫 가족 면회는 4월28일에 이루어졌다. 그마저 하루 세 명으로 제한됐다. 이희호는 5월1일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54일 만이었다. 살이 쭉 빠지고 걸음걸이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김대중은 이때의 사정을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고관절 변형으로 앉기가 무척 불편했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너무 아파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무릎을 굽힐 수 없으니 식사할 때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최소한의 의자와 식탁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김대중이 수감돼 있던 4월20일 큰손녀가 태어났다. 이희호는 김대중에게 할아버지가 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김대중은 옥중에서 큰손녀의 이름을 ‘지영’이라고 지어주었다.

    공판때마다 시위 방식도 바꿨다 방청권을 모아 놓고 불에 태우고
    보라색 한복·원피스 만들어 입고 흰 부채·우산에 구호를 써넣었다
    가족들은 점차 투사로 거듭났다 가족들은 ‘승리의 목도리’를 짜
    양심수 영치금을 보태는 데 썼다

    1976년 ‘3·1 명동성당 사건’ 구속자 가족들은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안에 있던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실에 모여 줄기차게 양심범 석방운동을 벌였다. 사진은 구속자 이름마다 형량을 적은 십자가를 붙여놓은 사무실에서 이희호·박용길·이종옥(오른쪽부터)이 나란히 앉아 애국심을 상징하는 보라색 원피스를 맞춰 입고, 브이자형 ‘빅토리 숄’을 뜨개질하고 있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이종옥씨 제공
    1976년 ‘3·1 명동성당 사건’ 구속자 가족들은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안에 있던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실에 모여 줄기차게 양심범 석방운동을 벌였다. 사진은 구속자 이름마다 형량을 적은 십자가를 붙여놓은 사무실에서 이희호·박용길·이종옥(오른쪽부터)이 나란히 앉아 애국심을 상징하는 보라색 원피스를 맞춰 입고, 브이자형 ‘빅토리 숄’을 뜨개질하고 있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이종옥씨 제공

    1976년 5월4일 오전 첫 공판이 시작됐다. 재판은 정동 덕수궁 옆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3·1 사건 재판을 제외한 모든 재판이 휴정했다. 법원 청사는 일반인 출입을 엄금했고 대법정으로 통하는 통로를 차단했다. 아무나 자유롭게 공판 과정을 지켜볼 수 없었다. 법원이 방청권을 250장으로 한정해 발행했고, 구속자 가족들에게는 가족당 6장만 내줬다. 나머지는 중앙정보부와 경찰이 차지했다. 사실상 비공개 재판이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방청 제한 철회 성명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방청을 거부하고 ‘길거리 투쟁’에 나섰다.
    “나는 ‘검정 테이프로 십자가를 만들어 입에 붙이자’고 제안했어요. 민주주의와 언론자유가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상징하자는 뜻이었지요. 첫 공판이 있던 날 새벽에 김옥두 비서가 검정 테이프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재킷 안쪽에 여러 장 붙인 채 나왔어요. 우리는 아침 8시 박형규 목사가 시무하는 제일교회에서 기도회를 하고 나서 중앙일보사 아래층 찻집에 모여 기관원의 눈을 피해 테이프를 나눠 가졌어요.” 부인들은 구속자들을 싣고 오는 버스를 보려고 대법정 뒤편으로 갔다. 이희호와 가족들은 “공개재판 하라” “민주주의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외치고는 그 자리에 앉아서 입에 십자가형 검정 테이프를 붙였다. “그걸 붙이니 말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구호를 외칠 때는 테이프를 떼어서 이마나 볼에 옮겨 붙였지요.” 국내 언론은 이 시위를 외면했지만 <에이피>(AP) 통신은 이 침묵시위를 사진과 함께 각국에 전송했다.
    공판은 11일 뒤인 5월15일에 속개됐다. 이때부터 재판은 토요일마다 열렸다. 사람의 발길이 가장 적은 날을 택한 것이었다. 2차 공판 때 가족들은 방청권을 모아 길거리에 쌓아 놓고 불에 태워 버렸다. 공개재판을 요구하는 일종의 행위극이었다. 부인들은 찬송가를 합창하며 대법정 뒷문을 향해 행진했다. 구속자 가족들에게는 찬송가가 투쟁가였다. 정보과 형사들과 정보부 요원들이 부인들을 잡아 끌어당기며 시위를 방해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공판 때 연보라색 나일론으로 한복을 만들어 입었어요.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시위를 한다는 것을 표시하려는 것이었어요. 한복을 입으면 경찰이 우리 몸에 손을 대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했고요.”

    법정은 ‘민주주의 강의실’ 같았다 김대중이 박정희를 증인 신청하자
    검·판사들은 당황해 서로 쳐다봤다 “여기에 진짜 대통령이 있군”
    3·1사건으로 구속된 재야인사들이 김대중한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1976년 5월4일 ‘3·1 명동성당 사건’ 첫 공판이 비공개되자 구속자 가족들은 이희호의 제안대로 검정 테이프를 입에 붙이고 침묵시위를 벌여 항의했다. 사진은 그날 정동 서울형사지법 대법정 뒤편에서 십자가형 검정 테이프를 붙인 이희호와 김옥두 비서 등이 김대중의 출정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에이피> 통신이 전세계에 전송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6년 5월4일 ‘3·1 명동성당 사건’ 첫 공판이 비공개되자 구속자 가족들은 이희호의 제안대로 검정 테이프를 입에 붙이고 침묵시위를 벌여 항의했다. 사진은 그날 정동 서울형사지법 대법정 뒤편에서 십자가형 검정 테이프를 붙인 이희호와 김옥두 비서 등이 김대중의 출정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에이피> 통신이 전세계에 전송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가족들은 공판이 열릴 때마다 새로운 시위 방식을 찾아냈다. “나하고 박영숙씨가 아이디어를 많이 냈지요.” 어느 날은 흰 부채에 “공개재판” “민주주의 만세”라고 써 들고나오기도 했고, 흰 우산에 “민주인사 석방하라”고 써서 들고 있다가 일제히 펼쳐 보이기도 했다. “한복이 움직이기에 불편해서 보라색 원피스를 똑같이 만들어 입었어요. 아주 싼 감으로 만들었는데, 두 벌에 1만원 정도 들었지요. 그런데 큰돈을 들여 비싼 옷감으로 해 입은 것이라고 저쪽에서 소문을 냈어요.” 원피스 위쪽에는 각자 남편들의 수감번호를 새긴 헝겊을 붙였다. 구속자 가족들은 보라색 유니폼을 입고 덕수궁 정문 앞에 나란히 서서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법원 일대 거리를 행진하기도 했다.
    공판이 끝나면 구속자 가족들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모였다. 불구속 피고인인 이우정이 참석해 재판정의 분위기며 공판 과정 일체를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보고했다. 이우정은 ‘컴퓨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곱번째 공판일에는 경찰들이 또다시 폭력을 휘두르며 가족들의 시위를 막았다. 구속자 가족들은 내무부 장관이 경찰들에게 폭행을 하라고 명령했는지 물어보겠다며 정부종합청사로 찾아갔다. “그런데 종합청사에 도착하니 오전 근무시간인데도 청사 문을 닫아버렸어요. 열 명도 안 되는 여자들이 찾아왔다고 공무를 중단한 거예요.” 가족들은 닫힌 문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했다. 버스 한 대가 오더니 부인들을 강제로 태우고 태릉 푸른동산까지 데려가 쓰레기 버리듯 내버렸다. 그 뒤로도 경찰들은 여차하면 구속자 부인들을 버스에 태워 재판정에서 멀리 떨어진 여의도나 어린이대공원으로 실어다 내버렸다.
    감옥에 남편을 둔 구속자 가족들은 감옥 밖에서 싸우면서 점차 민주투사로 거듭났다.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는 ‘퍼스트레이디’를 지낸 사람인데도 체면을 내던지고 투쟁 대열의 맨 앞에 서서 싸웠다. 이희호는 아무리 험악한 상황에서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공덕귀가 이희호더러 험한 소리 한번 하지 않는다고 나무랄 정도였다. 이희호는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공판이 끝나면 기독교회관에 모여 브이(V)자형 보라색 ‘승리의 목도리’를 짰다. “보라색은 무궁화색이어서 애국심을 상징했지요. 우리는 ‘민, 주, 회, 복’이라고 박자를 맞춰가며 한 번에 네 코를 떴어요. 브이자형이어서 ‘빅토리 숄’이라고 불렀지요.” 빅토리 숄은 기독교회관에서만 짠 것이 아니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버스 안에서도 짜고 구치소에서 면회를 기다릴 때도 짰다. 혼자 있을 때도, 모여 앉아 있을 때도 뜨개질을 했다. 팔이 아파도 참았다. 이희호는 손이 빨라 가장 많이 짰다. 다 짠 목도리는 한 장에 10달러씩 받고 미국·캐나다·서독·일본의 교회와 인권단체에 팔려나갔다. “수익금은 돌볼 가족이 없는 무의탁 재소자들을 돕거나 양심수 영치금, 출옥한 복학생 등록금을 보태는 데 썼지요.”
    빅토리 숄이 저항의 상징이 되자 박정희 정권은 뜨개질마저 방해했다. 서울의 털실 가게에서 보라색 실이 사라졌다. 기괴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종옥은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처음에는 실을 구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마치 판금조처라도 내려진 것처럼 서울 장안의 모든 털실 가게에서 보라색 실만은 품절이어서 구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나라에서 우리의 뜻을 이해하고 지원해주는 분들에게 연락하여 그곳으로부터 보라색 털실을 구입하여 보내오게 하였다.”

    1976년 ‘3·1 사건’ 이후 4·19 혁명일을 맞아 구속자 가족들과 수유리 묘지를 찾은 이희호(왼쪽)는 사이비 단체들이 ‘김대중 화환’을 치워버리자 꽃송이를 뽑아 186기의 묘비마다 한송이씩 헌화를 했다. 사진은 외신기자들로부터 비서 김형국(오른쪽)이 받아 보관해온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했다.
    1976년 ‘3·1 사건’ 이후 4·19 혁명일을 맞아 구속자 가족들과 수유리 묘지를 찾은 이희호(왼쪽)는 사이비 단체들이 ‘김대중 화환’을 치워버리자 꽃송이를 뽑아 186기의 묘비마다 한송이씩 헌화를 했다. 사진은 외신기자들로부터 비서 김형국(오른쪽)이 받아 보관해온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했다.

    그 시절 이희호는 구속자 가족을 대변해 외국 언론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각오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남편들이 한 일은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일이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당당히 일하다가 고난을 받고 있는 우리의 남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3·1 사건 가족들의 투쟁은 국외의 연대 투쟁을 불렀다. 목사 김재준·문재린을 비롯해 미국과 캐나다에 사는 반독재 민주인사들이 교포들이 밀집한 거리에서 모국의 민주화 투쟁을 지원하는 동조 시위를 벌였다. 한국 민주화에 관심이 많았던 하버드대학 교수 제롬 코언은 직접 방한해 동교동을 찾아오기도 했다. 이희호는 코언이 쓴 메모를 받아 구치소 면회에 갔다. “면회실에는 핸드백도 들고 가지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메모지를 조그맣게 말아 손에 쥐고 들어갔지요. 면접과장이 옆에 앉아 있어서 직접 줄 수가 없었어요. 전에 변호사가 남편 다리가 부었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이 생각나 ‘다리가 부었다는데 좀 보자’고 했지요. 남편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볼 것 없다’고 해요. 그래도 ‘좀 봐요’ 하면서 양말 속에 코언 교수의 메모를 넣어줬지요. 특별한 메시지가 있었던 게 아니고, 독방에서 홀로 지내는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라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했던 거지요.”
    1976년 8월 3·1 사건 구속자들에게 중형이 구형되자 강신석을 비롯한 전남 지역의 목사들이 광주 양림교회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을 지지하는 ‘제2차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이 일로 선언에 참여한 목사 9명이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은 구속된 목사들을 격려하는 기도회에 참석하기로 하고 8월14일 새벽 첫 고속버스를 탔다. 항상 붙어 다니며 감시하는 형사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따돌렸다. 구속자 부인들은 광주에 가까워지자 버스 안에서 보라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버스가 장성 갈재를 지나갈 무렵 경찰차가 따라붙었다. 고속버스는 터미널이 아니라 공설운동장으로 들어갔다. 공설운동장 상공에 헬리콥터가 뜨고 주변에 공중전화가 가설되고 기동경찰대가 들이닥쳤다. 구속자 가족들은 목사들을 면회하지도 못하고 버스에 탄 채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고작 열 명 남짓한 부인들을 되돌려 보내려고 정권은 공권력을 있는 대로 동원해 법석을 떨었다.
    밖에서 가족들이 시위와 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구속자들은 법정 안에서 또 다른 형태의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내로라하는 학자·목사·신부들이 재판을 받는 법정은 ‘민주주의의 강의실’이었다.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유신정권이 심판받는 것 같았다. 고령이라는 이유로 구속을 면한 함석헌은 “민주주의가 죽었다”며 공판 때마다 삼베 상복을 입고 입정했다. 문익환은 “많은 민주화 동지들과 같이 감옥생활을 할 특권을 받은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문영은 “감옥에 있는 것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쁘다”며 “나에게 죄가 없기에 판사가 석방시킬까봐 오히려 걱정했다”고 말했다. 신학자 서남동과 안병무는 3·1 사건으로 재판과 옥고를 거치며 민중신학이라는 한국적 신학을 탄생시켰다.
    재판정은 논리와 학식으로 무장한 피고인들의 목소리로 뜨거웠다. 법복을 입은 독재의 하수인들은 지식인들의 열변에 밀려 말이 막히고 궁지에 몰리자 거드름을 피워 위축감을 감추려고 했다. 정일형은 회고록에서 그때의 법정 풍경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아무개 공안부 검사의 이야기인데, 우리 사건의 담당 검사로서 그의 지나친 허세라 할까 위압적인 태도는 그 과시가 정도 이상이고 수준 이하여서 웃음거리에 가까웠다. 팔자걸음으로 법정에 들어오는 것부터가 피고인과 방청석 심지어 다수 동원된 정보원들에게까지 야유를 받을 정도의 진풍경이었다.”
    독방에 갇힌 구속자들은 매주 토요일 호송버스에서 만나 서로 안부를 물었다.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법정의 김대중은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밝히고, 죄를 묻는 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자들이라고 역설했다. 3·1 민주구국선언문에 담긴 정치·경제·외교의 대안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반민주적 성격을 잘 아는 당사자로 박정희를 지목해 증인으로 신청하기도 했다. 검사와 판사들은 당황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대중은 자유를 빼앗긴 죄수로 법정에 나와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함석헌은 김대중의 식견과 언변에 무릎을 치며 “여기에 진짜 대통령이 있군” 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3·1 사건으로 남편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재야인사들과 인연을 맺었지요. 재야인사들도 처음엔 남편을 정치인으로만 알았다가 재판을 받으며 남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어요. 그때 맺은 인연이 먼 훗날까지 이어졌지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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