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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문의 트럭이 쾅…구사일생 남편 ‘붕대 유세’에 눈물이 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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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43회   작성일Date 20-10-0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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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12회) 71년 8대 총선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대선 끝나 한달도 안돼 총선 공화당은 군사작전하듯 하고
    신민당은 ‘진산파동’으로 내분 이대론 개헌저지선 1/3도 난망
    1971년 4월27일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이틀 뒤 김대중은 성명을 냈다. “국민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대한 애절하고도 열화와 같은 열망을 짓밟은 불법 부정을 묵인할 수 없다.” 김대중은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에서도 낙선의 괴로움보다 민주주의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이희호는 승리를 도둑맞은 남편을 위로했다. “당신은 아직 젊어요.” 달리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5월24일 전남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김대중은 오른쪽 팔목 깁스를 한 채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밤늦도록 기다린 청중들에게 마지막 열변을 토했다.(김대중평화센터 제공)
    5월24일 전남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김대중은 오른쪽 팔목 깁스를 한 채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밤늦도록 기다린 청중들에게 마지막 열변을 토했다.(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박정희 정권은 5월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 달도 안 돼 총선을 치르겠다니, 국회까지 통째로 손아귀에 넣겠다는 것이었다. 공화당이 군사작전을 벌이듯 국회의원 선거를 밀어붙이는 중에 신민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곤두박질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총재 유진산의 이상한 행보가 일으킨 ‘진산 파동’이었다.
    유진산은 충남 금산의 지역구를 난데없이 서울 영등포 갑구로 옮겼다. 공화당 의원 길재호와 묵계가 이루어졌다는 말들이 돌았다. 더 황당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유진산이 5월6일 국회의원 선거 후보 등록 마지막날 영등포 갑구마저 포기하고 비례대표 1번으로 옮겨 등록했다. 당과는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았다. 유진산은 영등포 갑구를 이름도 없는 29살 청년에게 주었다. 영등포 갑구는 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라 유진산에겐 땅 짚고 헤엄치기만큼 쉬운 곳이었다. 공화당은 박정희의 처조카사위를 후보로 세웠다. 유진산이 여당과 뒷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삽시간에 퍼졌다.
    영등포 갑구 당원 수백명이 유진산 집으로 몰려가 배신행위를 규탄했다. 이튿날 청년 당원들은 당사에 뛰어들어가 유진산 총재 사진을 불태웠다. 신문들도 유진산의 행보를 일제히 비난했다. 야당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하루아침에 꺼졌고, 선거 전망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당이 극심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신민당 중진·원로들은 5월7일 동교동에 모여 김대중에게 총재대행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선거에 이기려면 국민의 신망을 받는 인물이 앞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다른 ‘40대 기수’들이었다. 김영삼·이철승을 비롯해 계파가 다른 의원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신민당은 전당대회 의장 김홍일을 총재대행으로 선출한 뒤 선거에 들어갔다.

    “남편은 대선때보다 더 결사적” 15일동안 100곳 넘은 지원유세
    “저도 꽤 인기있는 연사였어요” 대선때처럼 찬조연설자로 뛰어

    1971년 ‘5·25 8대 총선’에서 김대중과 이희호는 ‘4·27 대선’ 때보다 더 열정적인 지원유세로 ‘진산 파동’ 등으로 불리했던 신민당의 승리를 이끌었다.
    1971년 ‘5·25 8대 총선’에서 김대중과 이희호는 ‘4·27 대선’ 때보다 더 열정적인 지원유세로 ‘진산 파동’ 등으로 불리했던 신민당의 승리를 이끌었다.

    김대중은 당의 요청을 받아 비례대표 2번으로 등록하고 전국 지원유세에 나섰다. “남편은 대통령 선거 때도 초인적인 강행군을 했는데, 쉴 틈도 없이 다시 국회의원 선거 운동에 나섰어요. 당직도 없이 백의종군했지요. 몸이 상하지 않을까, 테러를 당하진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박정희는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를 자기 뜻대로 결정했다. 군부 출신을 대거 발탁하고 청와대 경호실 출신, 대구사범학교 출신, 중앙정보부 출신을 후보로 내세웠다. 지역구 후보자의 다수가 친위세력으로 채워졌다. 국회를 장악해 또다시 헌법을 바꾸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신민당은 내분으로 찢겨 이대로 가면 개헌 저지선인 3분의 1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남편은 대통령 선거 때보다 더 결사적으로 뛰었어요. 당에서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아 선거운동에 드는 비용도 우리가 마련했지요.” 김대중은 전국을 돌며 유권자들에게 박정희의 개헌 음모를 막으려면 야당을 살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만약 이번에도 정부와 여당이 대통령 선거 때와 똑같은 부정을 되풀이한다면 4·19혁명과 같은 결의로 궐기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사력을 다해 외쳤다. 김대중의 호소는 국민의 뜨거운 반응을 끌어냈다. 공화당은 김대중의 궐기 경고에 밀려 대선 때처럼 대놓고 부정을 저지르지 못했다.
    김대중은 5월11일부터 선거 전날인 5월24일까지 무려 5300여㎞를 달렸다. 100곳이 넘는 지역을 찾아가 신민당 후보 지원 연설을 했다. “신민당 열세 지역에서도 남편이 지나가면 판세가 뒤바뀔 정도로 바람이 불었어요. 그러다 보니 후보들이 너나없이 남편의 지원을 얻으려고 했지요. 어떤 후보는 남편이 탄 자동차 앞에 누워 지원유세를 해주지 않으면 깔려 죽겠다고 하기도 했어요.” 국회의원 선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경상도 지역의 김대중 지지는 대선 때보다 더 격렬했다. 사람들은 지난 선거 때 이 지역에서 표가 제대로 나오지 않은 데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유세장에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서 막무가내로 남편을 끌어가니 유세 일정이 계속 뒤로 미뤄졌지요.”

    상경길 느닷없는 교통사고 남편 탄 차는 튕겨올라 굴러
    10분거리 경찰 2시간 뒤 현장에 언론보도도 1단짜리 한건이 전부

    전국 100여곳을 강행군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종종 심야 유세를 해야 할 정도로 환영받았다. 수만명의 청중이 몰려든 서울 서대문 병구 신민당의 횃불 유세 현장.(한겨레 자료사진)
    전국 100여곳을 강행군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종종 심야 유세를 해야 할 정도로 환영받았다. 수만명의 청중이 몰려든 서울 서대문 병구 신민당의 횃불 유세 현장.(한겨레 자료사진)

    선거기간 중 경남 진주 유세에서 벌어진 일은 민심의 김대중 지지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날 남강 옆 공원에 마련된 유세장에는 진주 시민뿐만 아니라 인근 농촌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4만5000명을 헤아렸다. 유세는 예정보다 4시간 가까이 늦어진 밤 10시30분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아무리 기다려도 연설자가 도착하지 않자 1만5000명이 집으로 돌아갔던 터였다. 김대중이 도착하자 3만 청중은 “대통령 선거 다시 하라”고 유세장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 마침 공화당 의장을 비롯해 당 간부들이 진주에 내려와 있었다. 공화당 사람들은 청중이 뿜어내는 열기에 놀라 폭동이 나는 것 아닌가 하고 가슴을 졸였다. 사정은 부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은 여기서도 예정에 없던 선거구로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부산의 선거구는 모두 여덟 곳이었는데, 유세장마다 2만~5만 명의 청중이 김대중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이희호는 8대 총선 때도 대통령 선거 때처럼 따로 찬조연설자로 뛰었다. “나에게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지역구를 돌았는데, 꽤나 인기 있는 연사였어요.” 이희호는 청중들과 문답하듯이 연설했다. “여러분, 독재를 원하십니까?” “아니오.” “그럼 민주주의를 원하십니까?” “네.” 단순명쾌한 문장이 연사의 강단 있는 목소리에 실려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대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박병배도 이희호의 덕을 보았다. “박병배 후보 지원 연설이 저녁에 대전역에서 있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거기서 박병배 후보를 뽑아 달라고 연설했지요. 그분이 선거가 끝난 뒤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와서 ‘김대중 의원 덕을 본 게 아니라 사모님 덕을 봤다’고 하더라고요.”

    3시 영등포 지원유세는 밤9시에 남편 열변에 군중은 ‘김대중’ 연호
    이튿날 조간 일제히 부상투혼 장면 결과는 신민당 약진 의석수 2배로

     5월6일 신민당 총재 유진산이 돌연 영등포 갑구 대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자 당원들이 그의 사진을 불태우며 항의하고 있다.(보도연감 1972년에서)
    5월6일 신민당 총재 유진산이 돌연 영등포 갑구 대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자 당원들이 그의 사진을 불태우며 항의하고 있다.(보도연감 1972년에서)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이른 5월24일 이희호는 둘째 오빠 이경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놀라지 마라. 교통사고가 났는데 김 서방은 괜찮은 것 같다.” 이희호는 그때 신민당 국회의원 후보 지원유세를 하느라 서울에 있었다. 둘째 오빠는 애써 목소리를 눌러 말했지만 김대중은 그때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했다. 이경호는 직전 대통령 선거 때부터 김대중의 주치의로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김대중 일행은 전날 전남 해남·진도 지원유세를 마치고 이튿날 아침 목포비행장으로 갔다. 서울 지원유세가 기다리고 있었다. 목포비행장 관계자가 비 때문에 비행기 운항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전날부터 비가 내렸지만 비행기 운항을 못할 만큼 악천후는 아니었다. 비행장 관계자의 말이 광주비행장에는 레이더 장치가 있어서 비행기가 뜰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김대중 일행은 차를 광주로 돌렸다.
    당시 김대중을 수행하던 권노갑은 김대중과 같은 차에 타고 있었던 터라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뒷좌석 오른쪽에 김대중 후보, 가운데에 이명우 경호실장, 왼쪽에 내가 탔고, 운전석 옆에는 주치의 이경호 박사가 타고 있었다. 김대중 후보와 내가 탄 차 뒤에는 목포에서 대절한 택시 2대에 경호원과 비서진이 나눠 타고 있었다.” 도로를 달리던 중에 김대중이 탄 차와 경호원 차 사이로 신혼부부 일행 다섯 명을 태운 택시 한 대가 끼어들었다. 김대중을 가까이서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차 넉 대가 나란히 질주하는 꼴이었다. 차가 무안국도에 접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맞은편에서 14톤 트럭이 달려오다가 느닷없이 급커브를 틀더니 중앙선을 넘어 돌진했다. “오른쪽으로 틀어!” 권노갑은 달려드는 트럭을 보자마자 손으로 앞좌석 운전사의 어깨를 탁 하고 내리쳤다. 운전사는 깜짝 놀라 사정없이 핸들을 돌렸다. 그 순간 대형 트럭은 김대중이 탄 차의 뒤쪽 트렁크를 들이받았다. 귀청을 찢는 듯한 격렬한 굉음과 함께 김대중이 탄 차는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가 떨어졌다.
    차는 도로와 논두렁 사이의 개천에 처박혔다. 김대중을 태운 차는 가까스로 트럭을 피했지만, 뒤따라오던 택시가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세 사람이 즉사했다. 김대중은 이 사고로 골반 관절을 다치고 오른손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경호실장 이명우도 팔을 다쳤고, 권노갑은 늑골에 금이 갔다. 김대중과 일행은 인근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았다.
    사고 처리 과정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사고 지점에서 10분 거리에 무안경찰서가 있는데도 경찰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유력 정치인이 하마터면 죽을 뻔한 대형 사고를 당했는데도 언론 보도는 <경향신문> 1단 기사가 전부였다. 중앙정보부가 보도를 틀어막은 것이었다. 검사가 문제의 운전사를 살인 혐의로 조사하자 즉시 다른 검사로 교체됐다. 교체된 검사는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하고 끝냈다. 세 사람이나 죽었는데 운전사는 구속조차 되지 않았다.
    사고를 낸 트럭의 차적을 조회해보니 경기도 화물유통회사 소속이었고 소유자는 공화당 국회의원의 아들이었다. 교통사고로 위장해 박정희의 제1 정적을 죽이려고 한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1950년 한국전쟁 중 목포형무소에서 인민군에게 총살당하기 직전에 살아난 뒤 21년 만에 다시 사선을 넘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컸다. 박정희 정권의 신변 위협을 느끼며 김대중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그 뒤로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됐다. 독재의 발톱은 강철같이 튼튼했던 김대중의 몸에 영구장애를 새겨 넣었다.
    응급수술을 마친 김대중 일행은 서둘러 열차를 탔다. 열차는 밤 9시가 넘어서야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비서 김옥두가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나는 김 의원을 보자 눈물이 솟구쳤다. 오른쪽 팔목에 붕대를 감은 채 이마에는 피멍이 솟은 채로 개찰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김대중은 영등포역 앞 유세장으로 향했다. 그 지역 후보들이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로 예정된 지원유세가 무려 여섯 시간이나 미뤄져 있었다. 마침내 김대중이 나타나자 1만여명의 청중들이 천둥 같은 함성을 질렀다. 마치 전쟁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장수를 환영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김대중은 사고 경위를 설명한 뒤 열변을 토했다. “나는 열 번 쓰러지면 열한 번 일어나고, 백 번 쓰러지면 천 번 일어나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세우고 대중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군중은 ‘김대중’을 연호했다.
    이희호는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다른 후보들 지원유세를 계속하느라 뒤늦게 영등포로 향했다. “몹시 걱정이 됐지만 마음을 다잡고 후보 지원유세를 했어요. 용산에서 출마한 김원만 후보 찬조연설을 마치고 서둘러 영등포역으로 갔지요. 유세장에 도착해보니 남편이 윤길중 후보의 지원연설을 하고 있었어요. 오른팔을 붕대로 목에 건 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어요. 그날 밤 잠이 들기 전에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지요. 남편의 앞길을 보호해 달라고요.”
    김대중이 팔을 다친 채 연설하는 장면은 투표일 아침신문에 일제히 실렸다. 김대중의 부상 투혼은 표심에 적잖이 영향을 주었다. 선거 결과는 신민당의 대약진이었다. 신민당은 7대 국회보다 의석수를 두 배나 늘렸다. 전체 204석 가운데 89석을 얻었다. 개헌 저지선인 65석을 24석이나 웃도는 전례 없는 성적이었다. 공화당은 113석을 차지했다. 공화당은 현역 의원 26명이 무더기로 낙선했다. 반면에 신민당은 서울에서 전체 19곳 중 18곳에서 승리했다. 진산 파동이 있던 영등포 갑구만 박정희의 인척에게 내주고 나머지는 모두 야당이 석권했다.
    부산에서도 전체 여덟 곳 중 여섯 곳에서 신민당 후보가 뽑혔고, 대구에서는 다섯 선거구 가운데 네 곳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제쳤다. 대통령 선거에서 저열하게 지역감정을 선동했던 국회의장 이효상도 대구 시민의 심판을 받아 떨어졌다. 관권과 부정이 활개 치던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사실상 야당의 대승이었다. 대선과 뒤이은 총선에서 야당은 김대중을 앞세워 박정희와 공화당에 사실상의 패배를 안겼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그대로 두고 정상적인 선거방식으로 겨루어서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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