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로그인 회원가입
  • 소식
  • 언론보도
  • 소식

    언론보도

    이희호의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 합시다’…피켓 들고 거리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30회   작성일Date 20-09-25 10:57

    본문

    [이희호 평전] 제2부 만남과 동행-1회 YWCA 총무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와이연합회) 총무를 맡은 이희호는 가장 먼저 ‘혼인신고를 합시다’ 캠페인을 벌였다. 훗날 호주제 폐지와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지는 여성인권운동의 물꼬를 튼 사업이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5대 총선을 앞둔 7월19일 와이더블유시에이를 비롯한 여성단체연합회 회원들이 종로 거리에서 축첩 반대 시위를 하는 모습으로, ‘축첩자에 투표 말라, 새 공화국 더럽힌다’ 등 펼침막의 글씨 중에는 이희호가 직접 쓴 것도 있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와이연합회) 총무를 맡은 이희호는 가장 먼저 ‘혼인신고를 합시다’ 캠페인을 벌였다. 훗날 호주제 폐지와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지는 여성인권운동의 물꼬를 튼 사업이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5대 총선을 앞둔 7월19일 와이더블유시에이를 비롯한 여성단체연합회 회원들이 종로 거리에서 축첩 반대 시위를 하는 모습으로, ‘축첩자에 투표 말라, 새 공화국 더럽힌다’ 등 펼침막의 글씨 중에는 이희호가 직접 쓴 것도 있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귀국 짐 풀고 찾은 곳은 모교 사회사업학과 과장인 외숙모는
    교수의 길을 제안하고… 한학기 만에 뜻밖의 경로변경
    박마리아 부총장이 이력서 갖고 YWCA를 가보라고…
    결국 현장활동 총무직 선택

    이희호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미국 유학을 마침으로써 이희호의 수업시대도 끝이 났다. 돌아온 이희호를 만난 사람들이 가장 놀란 것이 태도의 변화였다. 어디를 가나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사람이 말수가 줄어들고 차분해졌다.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타고난 성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심지어 차갑게 보인다고도 했다.
    이희호의 인상에 대한 평가는 미국 유학 이전부터 이희호를 아는 사람과 미국 유학 이후 알게 된 사람 사이에서 뚜렷이 갈렸다. 유학 전에 만난 사람들은 이희호를 넘치는 활기를 감추지 못하는 활달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반대로 뒤에 만난 사람들은 이희호를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사람으로 알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미국에서 고생을 한 탓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주위에서 내가 바뀌었다고 했어요.” 미국에서 보낸 4년의 시간은 말하자면 발효와 숙성의 기간이었다. 세월이 가면서 생기는 자연스런 정서의 변화에 더해 문화 충격과 지적 훈련으로 마음이 단련됐고 생각이 깊어졌다.
    1958년 8월 귀국 짐을 풀어놓고 이희호가 먼저 찾아간 사람은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과장으로 재직하던 외숙모 이매리였다. 하와이 이민 2세인 외숙모는 미군정이 들어선 뒤 1946년 미군정청 후생부 고문으로 한국에 왔다가 이듬해 이화여대 기독교사회사업학과(후에 사회사업학과)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미국으로 돌아간 외숙모는 한국전쟁이 끝나자 남편(외삼촌 이원순)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그 후 자신이 만든 학과에 자리를 잡았다.
    “외숙모를 찾아뵈었더니 학생들에게 강의를 해달라고 했어요.” 이희호는 사회사업학과 학생들에게 사회학 원서 강독을 했다. 또 이화여대에 부설된 사회사업관의 관장 자리도 맡았다. “사회사업관은 이화여대 인근 지역의 빈곤가정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시설이었어요. 초등학교도 못 간 청소년들을 불러 야학을 열고 가난한 집 여성들을 상담하는 일을 했지요. 낮에는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사회사업관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그때 이희호는 대학교수의 길로 나아갈 생각을 했다. 누가 보아도 학생을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한 학기 만에 뜻하지 않은 경로 변경으로 중단됐다. 그 전환의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당시 이화여대 부총장이던 박마리아였다. 박마리아는 이승만 정권의 제2인자인 국회의장 이기붕의 부인으로 위세를 떨쳤다. 남편 이기붕을 뒤에서 좌지우지했고 이화여대의 실권도 쥐고 있었다.

    1958년 8월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희호는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과장이던 외숙모 이매리 교수의 권유로 모교에 출강하며 부설 사회사업관의 관장 자리도 맡았다. 사진은 이화여대 교정에서 사회사업학과 제자들과 함께한 모습으로, 뒷줄 왼쪽 넷째가 강사 이희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58년 8월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희호는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과장이던 외숙모 이매리 교수의 권유로 모교에 출강하며 부설 사회사업관의 관장 자리도 맡았다. 사진은 이화여대 교정에서 사회사업학과 제자들과 함께한 모습으로, 뒷줄 왼쪽 넷째가 강사 이희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58년 12월 어느 날 이희호의 서울대 사범대 후배가 사회사업관으로 찾아왔다. “내가 창설에 관여했던 대한여자청년단에서 박마리아 부총장을 단장으로 모셨는데, 나더러 부단장을 맡아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나는 여자청년단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지요.” 여자청년단 쪽에서는 박마리아를 찾아가 이희호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희호는 박마리아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가지 않았다. 이기붕은 당시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타락의 상징이었다. “자유당이 워낙 욕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박마리아 부총장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며칠 있다가 또 연락이 와서 한번 보자는 거예요.”
    이희호는 외숙모 이매리와 의논했다. 외숙모는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판에 부총장이 만나자고 하는데 계속 거절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이희호는 박마리아를 찾아갔다. 박마리아는 당시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도 맡고 있었다. “미국 유학 생활이며 이런저런 이력을 이야기했지요. 그랬더니 ‘지금 와이더블유시에이에서 총무를 찾고 있는데 이희호씨가 적합한 것 같으니 생각이 있으면 이력서를 가지고 박에스더 선생을 만나 보라’고 했어요.”
    박에스더는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 고문이었다. 미국 국적 한국인인 박에스더는 1950년 한국전쟁이 난 뒤에 미국에 파견돼 전후에 한국 와이더블유시에이가 성장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었다. “그때까지는 와이더블유시에이에 총무가 없었어요. 박에스더 선생님이 고문으로 사실상 총무 일을 맡고 있었지요. 그분을 만나뵈었더니 ‘며칠 있으면 이사회가 열리는데 거기서 총무 선임 안건이 통과되면 알려주겠다’고 하셨어요. 그해 말에 나를 총무로 쓰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와이더블유시에이 이사회의 결정을 받아들고 이희호는 한동안 고민을 했다. ‘학문의 길을 갈 것인가, 사회운동으로 나설 것인가?’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재미를 느꼈기 때문에 교수의 길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와이더블유시에이로 가겠다고 결심했죠. 사회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와이더블유시에이에서는 여성운동을 할 수 있으니까 학교에 남는 것보다는 와이더블유시에이 총무 일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학문의 울타리 안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보다 사회와 직접 만나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이희호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근본 지향이었다. 이희호는 “나는 학구파가 아니다”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그것은 곧 자신이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희호에게 공부는 목표라기보다는 활동의 동력이고 바탕이었다.
    1959년 1월3일부터 이희호는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 총무로 출근했다. 연합회는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를 비롯해 전국에 있는 와이더블유시에이의 연합조직이었다. “총무에게는 전용 승용차가 나왔는데, 이 차를 타고 기동성 있게 전국을 다녔어요.”
    이희호는 총무로 취임하자마자 와이더블유시에이의 분위기를 확 바꾸었다. 사회운동가 출신답게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희호가 제안한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당시엔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뒤에 첩으로 들어온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는 바람에 조강지처가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자식 낳고 살다가 하루아침에 빈손으로 집밖에 나앉는 거지요.” 이희호는 포스터를 만들어 전국의 지역 와이더블유시에이에 보내 붙이게 하고 띠를 어깨에 두르고 거리 캠페인에 나섰다.
    이희호가 만든 이런 활동의 기조는 그 뒤로도 계속됐다. 4·19 혁명 후 첫 국회의원 선거 때는 와이더블유시에이가 중심이 돼 여성단체들과 함께 ‘축첩자를 국회에 보내지 말자’는 운동도 벌였다. ‘첩 둔 남편 나라 망친다’, ‘아내를 밟는 자 나라 밟는다’ 같은 문구를 붓으로 써 피켓과 플래카드를 만들고 거리행진을 했다. 사실상의 일부다처제로 여성이 고통받고 있던 때에 일부일처제는 여성 권리 보호의 중요한 장치였다. 이런 활동은 그때까지 와이더블유시에이가 보여온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와이더블유시에이의 어른들은 마뜩잖게 여겼고, 여자청년단 출신이어서 그런다고 수군대기도 했다.
    그렇게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하는 중에도 이희호 총무의 와이더블유시에이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박마리아가 회장으로 있던 여성단체들이 이승만-이기붕 지지 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와이더블유시에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와이더블유시에이는 회칙에 불편부당이라고 돼 있었어요. 그걸 방패로 삼았지요. 박마리아 회장이 아주 섭섭해했어요.”
    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 총무로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희호는 거리에서 김대중과 마주쳤다. 부산 피란 시절 면우회에서 만난 뒤로 6년 만이었다. 두 사람은 근처 다방에 들어가 잠깐 동안 안부를 주고받았다. “내가 와이더블유시에이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어요. 정치에 입문했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좀 힘들어 보였어요.” 두 개의 선이 먼 곳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교차점을 지나는 것과 같은 조우였다. 이 짧은 만남은 이후 그들의 긴 만남을 예고했다. 다방을 나온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길을 갔다.
    1959년 9월 이희호는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와이더블유시에이대회에 참가했다.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 회장인 최이권, 뒷날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 회장이 되는 손인실과 동행했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미국으로 가 뉴욕 와이더블유시에이 본부에 한달을 머물고 또 코네티컷주 하트퍼드, 델라웨어주 웰밍턴의 와이더블유시에이에 두달을 더 머무르며 프로그램 운영의 새 기법을 익혔다. 이어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영국·이탈리아·그리스를 돌며 그 나라 여성계를 방문해 견문을 넓혔다. 그 뒤 이희호 일행은 타이·홍콩·일본의 와이더블유시에이를 돌아보고 1960년 2월에 귀국했다. 반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돈 기나긴 학습여행이었다.
    4·19혁명 뒤 첫 총선에서 “첩 둔 남편 나라 망친다” 거리시위 YWCA 어른들은 마뜩잖아
    4·19혁명으로 박마리아 죽음맞아 수도병원 장례식에 가니망연한 프란체스카의 모습이
    1960년 4월28일 권총 자살극으로 막을 내린 부총리 이기붕·박마리아 일가의 장례식장인 수도육군병원으로 문상을 갔던 이희호는 이승만(가운데 앉은 이)과 프란체스카(이승만의 오른쪽) 부부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았다. ‘4·19 혁명’으로 하야 선언을 한 독재자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해 5년 뒤 죽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0년 4월28일 권총 자살극으로 막을 내린 부총리 이기붕·박마리아 일가의 장례식장인 수도육군병원으로 문상을 갔던 이희호는 이승만(가운데 앉은 이)과 프란체스카(이승만의 오른쪽) 부부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았다. ‘4·19 혁명’으로 하야 선언을 한 독재자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해 5년 뒤 죽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세계를 돌고 돌아오니 정국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게 될 3·15 부정선거를 한달 앞둔 시점이었다. 전해 7월 이승만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대로 보냈다. 정적에 대한 비열한 사법살인이었다.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에 맞서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뽑았다. 1월말 미국으로 위장 수술을 받으러 떠났던 조병옥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2월15일 세상을 떠났다. 4년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은 두번째 변고였다. 대통령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제 선거판 관심은 85살의 대통령을 뒷받침할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쏠렸다.
    이승만 정권은 온갖 부정선거 계획을 짜 이승만-이기붕 당선 공작을 폈다.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전국의 시장, 군수, 경찰간부를 매일 20명씩 불러 부정선거 방법을 교육하며 무슨 짓을 해서든 이승만-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고 독려했다. 사전투표와 공개투표가 난무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이기붕이 얻은 표가 유권자 수보다 많이 나와 두 사람의 득표율을 다시 낮춰야 할 지경이었다. 3월15일 민주당은 이번 선거가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그날 저녁 마산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날 최루탄에 맞아 죽은 마산상고 1학년 학생 김주열은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주검으로 떠올랐다.
    당시 민주당 선전부 차장을 맡고 있던 정치인 김대중도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 김대중은 4월6일 민주당 중심의 서울시내 거리시위를 선도했다. 내무부 장관이 발포도 불사한다는 포고령을 낸 터라 시위대 앞에 서는 것은 총구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집을 나온 김대중은 휴대용 확성기를 메고 서울시청 앞에서 시작해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을 지나 광화문 네거리로 시위대를 이끌었다. 수천명의 시민들과 함께 “부정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고 외쳤다.
    4월19일 서울시내 대학생과 시민 2000여명이 경무대로 향하다 경찰 발포로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위는 이제 통제할 수 없는 노도가 되어 권력자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이승만은 4월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186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 얻은 승리였다. 성난 군중은 서대문 이기붕의 집을 습격해 온갖 사치품들을 끌어내 불태웠다. 시위 군중을 피해 도망간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28일 새벽 경무대 별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큰아들 이강석이 아버지·어머니·동생을 권총으로 쏴 죽인 뒤 자살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의 환심을 산 뒤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 남편을 정권의 2인자로 만들고 큰아들을 이승만의 양자로 들여보냈다. 권력을 업고 호가호위하던 박마리아의 삶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희호는 와이더블유시에이 식구들과 함께 경복궁 동문 앞 수도육군병원으로 갔다. 박마리아와 이기붕 일가의 주검이 안치된 곳이었다. 살아생전에 멀리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을 떠난 마당에 장례식마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이희호는 권좌에서 쫓겨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모습도 보았다. “추모 예배를 보고 앉아 있는데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들어오더라고요. 나란히 놓인 관 네 개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비참해 보일 수가 없었어요.” 이승만은 권력을 잡으려고 친일파를 끌어들이고 민족반역자들을 요직에 앉힘으로써 사회정의를 뿌리째 흔들고 나라의 기틀을 무너뜨렸다. 폭정으로 반대파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모든 것을 잃은 독재자의 뒷모습은 한없이 초라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이희호는 뜻 맞는 동지들과 ‘5월회’를 만들어 젊은이들이 흘린 피를 기억하자고 결의했다. “이름에 특별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4·19가 끝난 뒤 5월에 모였다 해서 5월회라고 불렀어요.” 김일남·김용준·조향록·이한빈·엄기형·서영훈을 비롯해 40여명이 함께했다. 함석헌, 박종홍 같은 어른들을 모셔 강연을 듣고 토론했다. 그러나 이 모임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5월 군사쿠데타가 나자 뿔뿔이 흩어졌다.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소식
    Total 68건 3 페이지
    • RSS
    언론보도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8
    기념사업회
    조회 Hit 827            작성일 Date 2020-10-07
    기념사업회 827 2020-10-07
    37
    기념사업회
    조회 Hit 787            작성일 Date 2020-10-07
    기념사업회 787 2020-10-07
    36
    기념사업회
    조회 Hit 880            작성일 Date 2020-10-07
    기념사업회 880 2020-10-07
    35
    기념사업회
    조회 Hit 907            작성일 Date 2020-10-07
    기념사업회 907 2020-10-07
    34
    기념사업회
    조회 Hit 1300            작성일 Date 2020-10-05
    기념사업회 1300 2020-10-05
    33
    기념사업회
    조회 Hit 1373            작성일 Date 2020-10-05
    기념사업회 1373 2020-10-05
    32
    기념사업회
    조회 Hit 1043            작성일 Date 2020-10-05
    기념사업회 1043 2020-10-05
    31
    기념사업회
    조회 Hit 1197            작성일 Date 2020-09-25
    기념사업회 1197 2020-09-25
    30
    기념사업회
    조회 Hit 1373            작성일 Date 2020-09-25
    기념사업회 1373 2020-09-25
    29
    기념사업회
    조회 Hit 1564            작성일 Date 2020-09-25
    기념사업회 1564 2020-09-25
    열람중
    기념사업회
    조회 Hit 1031            작성일 Date 2020-09-25
    기념사업회 1031 2020-09-25
    27
    기념사업회
    조회 Hit 1170            작성일 Date 2020-09-25
    기념사업회 1170 2020-09-25
    26
    기념사업회
    조회 Hit 901            작성일 Date 2020-09-23
    기념사업회 901 2020-09-23
    25
    기념사업회
    조회 Hit 1257            작성일 Date 2020-09-23
    기념사업회 1257 2020-09-23
    24
    기념사업회
    조회 Hit 765            작성일 Date 2020-09-23
    기념사업회 765 2020-09-23

    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