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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전쟁통에 짓눌린 여성을 위해 여성문제연구원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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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70회   작성일Date 20-09-2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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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평전] 제1부 학업시대-6회 여성운동 첫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 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여성의 사회진출과 권익을 위해 피란지 부산에서 여자청년단 결성
    전쟁중이라 군경원호 사업에 그쳐 1년 남짓 활동하다 제발로 그만둬
    강원용 기독학생운동 재건 돕다가 황신덕·박순천·이태영 등과
    여성문제연구원 창립 훗날 여성문제연구회로 개칭
    남녀차별 철폐 가족법 개정 씨앗

    이화여전과 서울대 선배로 ‘여성 변호사 1호’인 이태영과 이희호의 인연은 1952년 여성문제연구원 때부터 한층 돈독해져 평생토록 이어졌다. 남편 정일형 박사도 후배 김대중을 정치적 후계자로 여길 정도로 아끼고 지지했다. 사진은 1949년 이태영(오른쪽)이 34살 늦은 나이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할 때 정일형(왼쪽)이 축하해주는 모습.  사진 정일형이태영기념사업회 제공
    이화여전과 서울대 선배로 ‘여성 변호사 1호’인 이태영과 이희호의 인연은 1952년 여성문제연구원 때부터 한층 돈독해져 평생토록 이어졌다. 남편 정일형 박사도 후배 김대중을 정치적 후계자로 여길 정도로 아끼고 지지했다. 사진은 1949년 이태영(오른쪽)이 34살 늦은 나이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할 때 정일형(왼쪽)이 축하해주는 모습. 사진 정일형이태영기념사업회 제공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대재앙이었다. 전선은 거대한 롤러처럼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그 아래 사람들을 벌레처럼 깔아뭉갰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럽 전역에 쏟아부은 폭탄보다 더 많은 폭탄이 반도를 초토화했다. 전쟁이 치러진 3년 동안 최소 300만명의 남북한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한반도 인구 3000만명의 10%가 사라졌다. 전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군인보다 더 많은 민간인이 폭격에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좌익이라는 이유로, 우익이라는 이유로, 좌익인지 우익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수십만명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다. 한반도 전체가 증오범죄 현장이었다. 증오는 여자도 아이도 피해가지 않았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극단의 범죄적 전쟁이었다. 한국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저주였다.
    이희호는 그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남한 정부는 도망가고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이희호는 종로구 충신동 큰오빠 집에 숨어 살았다. 언제 인민군에게 잡혀갈지 몰라 안심할 수 없었다. “교육받은 사람은 더 잡아가려고 하니까, 옷도 허름한 것을 입고 얼굴에는 검댕을 묻히고 머리도 헝클어뜨리고 다락방에 숨어서 지냈지요.”
    8월 중순쯤 친구가 고향에 갔다가 올라왔다. 이희호는 친구와 함께 서울을 빠져나갔다. 철교가 끊어진 한강을 배를 타고 건너 친구의 집이 있는 충남 서산으로 향했다. 나흘 동안 쉬지 않고 걸었다. 그보다 조금 앞서, 훗날 이희호의 남편이 될 김대중도 인민군 치하의 서울을 빠져나갔다. 6·25 직전 해운업 일로 출장을 왔다가 서울에 발이 묶인 김대중은 이희호가 간 길과 비슷한 길을 따라 목포로 향했다. 지상은 인민군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하늘은 미군기가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기는 땅 위의 움직이는 것들을 향해 총탄과 폭탄을 퍼부었다. 하늘의 미군은 민간인과 적군을 애써 구분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만경평야에서 전투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목포 인근에서는 미군기의 기총소사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비슷한 일을 피란 중의 이희호도 겪었다.
    “큰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헬리콥터가 날아오더니 피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어요. 사람들이 미친 듯이 숨을 곳을 찾아 뛰었지요. 나는 근처의 큰 나무 아래로 뛰어가 숨었어요.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총탄을 맞아 죽기도 했고요. 그런 일을 서산까지 가는 동안 세 번쯤 겪었습니다.”

    이희호는 부산 피난 시절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의 인권 보호 필요성을 절감하고 황신덕·박순천·이태영 등과 1952년 11월 여성문제연구원 창립에 나선다. 상임간사를 맡은 이희호는 호주제 폐지 운동의 첫 씨앗을 뿌려 훗날 청와대 시절 결실을 맺는다. 사진은 황신덕(뒷줄 왼쪽) 교장과 박순천(맨 오른쪽) 부교장이 1940년 10월 서대문구 죽첨정 황손 이우의 벽돌집을 하사받아 개설한 경성가정여숙(중앙여고의 전신) 입구에서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는 부산 피난 시절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의 인권 보호 필요성을 절감하고 황신덕·박순천·이태영 등과 1952년 11월 여성문제연구원 창립에 나선다. 상임간사를 맡은 이희호는 호주제 폐지 운동의 첫 씨앗을 뿌려 훗날 청와대 시절 결실을 맺는다. 사진은 황신덕(뒷줄 왼쪽) 교장과 박순천(맨 오른쪽) 부교장이 1940년 10월 서대문구 죽첨정 황손 이우의 벽돌집을 하사받아 개설한 경성가정여숙(중앙여고의 전신) 입구에서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는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28일 서울을 수복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미군과 국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자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서울이 다시 위태로워졌다. 지난여름 서울에 남았다가 죽을 고생을 한데다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 정권이 인민군 부역자를 색출한다고 법석을 떨었기 때문에 서울시민은 너나없이 짐을 쌌다. 12월 하순 이희호는 피란민 대열에 끼어 부산으로 향했다. 운좋게 기차를 탔다. 임시수도 부산은 그나마 사람이 사람 꼴을 하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이희호의 가족들도 부산에 모였다. 남원도립병원에 있던 아버지는 부산 조선방직회사 부설 병원의 내과 과장으로 들어갔다. 1950년 12월말 부산에 도착한 이희호는 처음에는 큰오빠 집에 있다가 아버지의 전셋집으로 거처를 옮겨 1953년 휴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부산에서 이희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한여자청년단 결성이었다. 그 시절 대한청년단은 위세가 대단한 반공청년단체였다. 대한청년단 안에 여성국이 있었는데, 이희호의 친구 김정례가 여성국장을 맡고 있었다. 이희호와 김정례는 서울에 있을 때부터 여성국을 따로 떼어내 여자청년단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다. “북한에선 여맹(노동당 산하 여성동맹)을 만들어 활발히 활동을 하는데 그게 인상 깊었어요. 서울 수복 뒤 김정례씨를 만났더니 ‘우리끼리 여자청년단을 만들자’고 하는 거예요.” 김정례·이희호 외에 박기순·장옥분이 의기투합했다. 대한여자청년단 총본부는 부산에서 결성됐다. 네 사람이 규약을 만들고 국방부 정훈국에 등록했다.
    “처음에는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을 단장으로 모시기로 하고 찾아갔는데, ‘이건 청년단이니까 청년들이 알아서 하는 게 좋겠다’ 해서 돌아섰지요.” 결국 시인 모윤숙이 단장, 여성운동가 김철안이 부단장을 맡았다. 또 총무국장 이정희, 조직국장 김정례, 선전국장 박기순, 외교국장 이희호로 실무조직을 짜고, 그 아래 부장들을 두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대구에서 간부 20여명이 합숙을 하며 지냈다. “원래 우리 목표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권익 향상을 돕는 여성운동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전쟁 중이라 여성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전시 군경원호 사업을 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여성이 주체가 되는 조직을 만들자고 해서 여자청년단을 결성했지만 하는 일이 군경원호 활동이니 이희호의 마음에 쏙 들 리 없었다. “1년 남짓 여자청년단에서 활동하다가 결국 제 발로 그만두었어요.” 그러다 부산에서 다시 만난 경동교회 목사 강원용과 기독교학생운동 재건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때 강원용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에서 청년조직을 맡고 있었다. 강원용의 회고다. “학생운동에 가장 열성을 쏟았던 나는 상이군인회관 안에 따로 방을 하나 빌려 학생운동 사무실로 썼는데, 당시 이희호가 나를 도와 그 사무실에서 실무를 보느라고 무척 애를 썼다. 나는 그 사무실과 남성여고 강당을 근거로 해서 학생들을 상대로 한 여러 활동을 해나갔다.”
    부산에서 강원용을 돕고 있을 때 이희호는 여성계 지도자인 황신덕·박순천·이태영과 자주 만났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었지만, 여성들은 가부장제 아래 짓눌려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의 인권을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일을 할 기구가 절실한 때였다. 이희호는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1952년 11월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황신덕이 초대 원장을 맡았고, 가장 젊은 이희호가 상임간사가 됐다. 이희호는 발기문 작성에서 연구원 등록까지 실무를 도맡아 했다.
    여성문제연구원이 첫발을 내딛던 해에 이태영이 변호사가 됐다. 이태영은 1951년 초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37살 나이로 합격했다. 여성 최초였다. 1952년 여름에는 15개월의 판검사 실무 수습을 좋은 성적으로 마쳤다. 당연히 판사로 임용되어야 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이태영의 남편 정일형이 야당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판사 임용을 거부했다. 당시 대법원장 김병로가 대통령의 인준은 형식적 절차일 뿐이라고 항의하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야당 하는 정일형의 마누라를 판사 시킬 수는 없어!” 이태영은 변호사로 개업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태영의 불행은 여성들에게 축복이 됐다. 변호사 이태영은 여성문제연구원에서 매달 법률 강좌를 열어 여성의 권리를 알리고 무료 상담을 했다. 이 법률 강좌와 무료 상담이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로 진화했고 1961년에 독립해 현재의 가정법률상담소가 되었다.
    전쟁통 부산에서 또다른 인연 대학생 모임인 면학동지회 재회
    매달 한번씩 만나며 김대중 알게 돼 정작 마음에 둔 이는 계훈제
    사흘 걸린 부산행 열차의 추억 계훈제 병 깊어지며 고민도 깊어져

    이희호는 1950년 말 피난지 부산에 정착하자마자 여성인권운동에 앞장서 대한청년단 여성국장이던 친구 김정례와 함께 대한여자청년단(여청) 결성을 주도한다. 시인 모윤숙을 초대 단장으로 추대했고 이희호는 외교국장을 맡았으나 전시 군경원호 활동에 치중하자 1년 만에 그만둔다. 사진은 초기 반년 동안 대구에서 합숙하던 시절 여청 간부들과 군부대 위문 공연을 갔을 때로, 왼쪽 셋째, 뒤편 장교 앞이 이희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는 1950년 말 피난지 부산에 정착하자마자 여성인권운동에 앞장서 대한청년단 여성국장이던 친구 김정례와 함께 대한여자청년단(여청) 결성을 주도한다. 시인 모윤숙을 초대 단장으로 추대했고 이희호는 외교국장을 맡았으나 전시 군경원호 활동에 치중하자 1년 만에 그만둔다. 사진은 초기 반년 동안 대구에서 합숙하던 시절 여청 간부들과 군부대 위문 공연을 갔을 때로, 왼쪽 셋째, 뒤편 장교 앞이 이희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여성문제연구원은 1959년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황신덕에 이어 1964년부터 이희호가 2대 회장을 맡았다. 여성문제연구원이 가장 주력한 것은 남녀차별 법조항을 철폐하고 헌법에 보장된 남녀평등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여성문제연구원이 시작한 남녀차별 철폐운동은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귀결했다. 비로소 여성은 남편이나 아들에게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동등한 권리주체가 됐다. 1989년 가족법 개정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의 총재 김대중이었다. 이희호가 속한 여성문제연구원이 가족법 개정 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훗날 남편의 입법활동으로 이 운동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서울의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도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다시 모였다. 33명으로 시작한 면학동지회는 전쟁이 나는 바람에 후속 회원을 뽑지 못했다. 대다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됐기 때문에 면학동지회는 이름을 면우회로 고치고 문을 외부로 열었다. 면우회는 매달 한번씩 모여 만남을 계속했다. 이 면우회에서 이희호는 김대중을 알게 된다. 물론 이때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때였다.
    그 부산에서 이희호가 정작 마음에 둔 사람은 따로 있었다. 4·19 이후 재야운동의 기수가 되는 계훈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사람의 만남은 애틋했지만 애틋한 마음으로 끝났다.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두 사람이 처한 여건이 나빴고 마음도 충분히 깊지 못했다. 이희호가 계훈제를 처음 만난 것은 6·25가 나기 직전 대학 졸업 무렵이었다. 면학동지회 회원 중 한 사람이 계훈제를 이희호에게 소개했다. 평안북도 출신인 계훈제는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위원장을 지냈고 서북청년회 멤버로서 당시 우익 학생운동의 주도자였다. 계훈제는 김구의 민족주의 노선을 따랐다. 김구를 존경했던 이희호는 계훈제를 동지적 결합을 해도 될 만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이희호와 계훈제 사이에 연민의 정이 생긴 것은 1950년 12월 부산 피란 때였다. 그때 계훈제는 결핵에 걸린데다 맹장염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이희호는 계훈제와 조카딸(계훈제 형의 딸)과 함께 국민방위군을 실어 나르는 부산행 열차를 얻어 탔다. 계훈제는 유작이 된 자서전 <흰 고무신>에서 열차 안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성탄절 눈 내리는 밤에 노래가 터져 나왔다. 민간인이라곤 이 여인(이희호)과 희(조카딸) 그리고 나뿐이다. 방위군이 한 곡 잘 넘기고 우리 동행인 이 여인에게 노래를 청했다. 들을 리 없다. 야유하며 강박한다. 이 여인은 (…) 내가 저들만 못하겠냐고 <아, 목동아!>를 불렀다. 아우성이 터졌다. 재청이 나왔다.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찻간에 자리한 병석을 차고 일어나서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이유 없이 죽어 가는데 노래가 다 무슨 노래냐. (…)’ 말이 떨어지자 어느 젊은 병사가 ‘저것, 빨갱이다’ 하며 확 달려든다. 담요를 푹 쓰고 발길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희호의 기억은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군인들이 억지로 노래를 시킨 것은 아니었고요. 기차가 부산까지 가는 데 사흘이나 걸렸어요. 지루하니까 노래들을 불렀어요. 그때 거기에 종로 깡패 이정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지독히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어요. 그때는 그이가 깡패라는 것을 몰랐는데, 그 사람이 좌중을 웃겨 가면서 노래를 하게 했어요. 그래서 (나를 포함해) 몇 사람이 돌아가며 불렀지요.”
    부산에 도착한 이희호와 계훈제 일행은 난민으로 가득 찬 역 앞 여관 복도의 사람들 틈에 끼어들어 하루를 보냈다. 이희호는 이화고녀 후배이자 면학동지회 멤버인 심치선을 찾아갔다. 심치선은 당시 연세대 학생이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부산 자갈치시장 옆 부둣가의 셋방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희호는 심치선의 어머니에게 병든 계훈제를 부탁하고, 먼저 부산에 와 있던 큰오빠 집으로 갔다. 계훈제는 같은 평안북도 출신인 심치선에게 장학금을 주선해준 일도 있었다. 그런 인연 때문에 심치선의 어머니는 계훈제에게 방 한 칸을 선뜻 내주었다.
    부산에 내려온 뒤 계훈제의 몸은 더욱 악화돼 심치선의 셋방에서 한달 반 만에 거제도 세브란스병원의 결핵병동으로 옮겼다. 결핵환자가 한방에 20명이나 누워 있는 곳이었다. 이희호는 대한여자청년단 활동과 기독교학생운동을 하는 중에도 자주 병동에 찾아와 환자를 간호했다. 1951년 가을에 계훈제는 마산 공군요양소로 옮겼다. 결핵으로 시작한 병은 늑막염으로 깊어졌다. 이희호는 그때도 이틀에 한번씩 간호하러 요양소를 들렀다. 그러나 병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희호는 계훈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희호는 그 시절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미국 유학의 꿈을 계속 꾸고 있었다. ‘유학을 간다면 병들어 요양소에 있는 사람은 어찌해야 하는가?’ 이희호의 마음에 계속 맴돌던 질문이었다. 그때 함께 기독교운동을 하던 강원용은 이희호에게 유학을 가라고 종용했다. 이희호는 망설임 끝에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휴전 뒤 서울로 올라온 이희호는 병든 사람을 두고 왔다는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계훈제는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요양소에 머물다 늑골 여섯 대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한 뒤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 4·19 나기 한 해 전에 서울로 올라왔다. 두 사람의 관계는 흔한 남녀관계가 아니라 동지적 연대라고 할 만한 관계였으나,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이희호의 성격 때문에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이 배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뒷날 계훈제가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이희호는 마음의 짐을 벗었다.

    인터뷰 녹취정리/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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