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 집행정지로 가석방될 때 김대중 내외(1978년) | |
ⓒ 김대중 평화센터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정부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1971년 5월 25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지 한 달도 안 돼 총선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야당으로서는 숨 돌릴 시간도 없는 버거운 싸움이었다. 김대중은 그해 5월 11일부터 24일까지 후보들의 지원 유세로 5000km 이상 전국을 누볐다.
투표 전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그날 김대중은 목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지원 유세를 할 예정이었다. 예약 확인 겸 목포비행장에 알아보니 비행기가 뜰 수 없다고 했다. 대신 광주비행장에서는 이륙이 가능하다고 했다. 서둘러 광주로 향했다.
빗발이 차창을 때렸다. 택시 한 대가 끼어들었다. 그들이 김대중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한참 달리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대형트럭이 나타나 그가 탄 승용차를 향해 돌진해 왔다. 트럭은 김대중의 승용차 트렁크를 들이받았다. 그러자 차량은 오른쪽 길 아래로 떨어져 나가 4미터 아래 논 위로 떨어졌다.
트럭은 차량 뒤를 따르던 택시를 정면으로 받았다. 그 충격으로 운전사와 승객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3명은 크게 다쳤다.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수행하던 권노갑 비서와 이명우 경호원도 크게 다쳤다. 뒤따르던 경호차에서 동생 대의가 뛰어와 일행을 구출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6.25전쟁 때 목포형무소에서 학살의 위기에서 벗어난 뒤 21년 만에 다시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것이다.
선거초반 '진산파동'이란 악재를 만났지만 야당은 선전하여 약진했다. 의원 204석 가운데 89석을 차지했다. 군소정당은 2석으로 양당제가 굳건해졌다. 특히 서울은 유진산씨가 '진산파동'의 빌미를 준 영등포 갑구만 제외한 나머지 18개 선거구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됐다.
부산에서도 8개 선거구 중 6개 지구, 대구에서도 5개 선거구 중 4개 선거구를 야당이 이겼다. 야당 바람은 도시에서는 태풍이었다.
▲ 김대중 생가 보도블록에 새겨진 어록 | |
ⓒ 박도 |
10월 유신
1972년 10월 11일 김대중은 총선 유세지원 중 다친 다리를 치료하고자 일본에 갔다. 게이오대학의 한 교수로부터 다리 치료를 받자 걷기에 훨씬 부드러워졌다. 10월 19일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귀국 이틀 전 최서면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 7시에 박 대통령의 중대발표가 있다는데 알고 있는가?"
"처음 듣는데, 무슨 내용 인지 아는 게 있는가?"
"잘 모르겠지만 좋지 않는 것 같구먼."
그날 오후 7시 일본에서 TV를 지켜봤다. 그날 박 대통령의 특별 선언은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내용이었다. 헌법을 바꾸고 유신헌법이라고 명명했다. 그 요지는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추천하며, 대통령이 헌법의 효력까지 정지시킬 수 있도록 긴급조치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통령은 3권위에 군림할 수 있고, 6년 임기에 연임제한을 철폐해 종신 집권이 가능토록 했다.
김대중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집 걱정 말라고 하면서 남편의 신변을 더 걱정했다.
"심상치 않아요. 서울에 오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일본에서 김대중은 '박 대통령의 특별선언은 영구 집권을 노리는 획책'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국내 언론에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김대중은 일본을 떠나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김대중 부부는 일본 TBS의 미요시 기자와 미국 CBS의 한영도 기자를 통하거나 아내의 이화여고 후배인 우순씨를 통해 서신을 주고받았다. 때로는 정보원을 따돌리고 아내는 제3의 장소에서 전화를 걸어 통화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혼자 다니지 마시고, 음식도 조심하세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노리고 미행한다는 것, 잊지 마셔야 해요."
아내는 매번 신변 염려를 했다.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면서 반 유신투쟁을 했다. 효과적인 투쟁을 하고자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결성했다. 중앙정보부 6국장이 아내를 찾아와 남편의 귀국을 종용한다고 전했다.
"이대로 반 정부운동을 계속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협박이었다. 김대중은 아내로부터 그런 말을 전해 들었지만 일본과 미국의 치안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하의도 김대중 생가 | |
ⓒ 박도 |
김대중 납치사건 – 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
1973년 7월 10일, 미국에서 일본으로 입국했을 때다. 공항에 마중 나온 동지들이 수심어린 표정으로 은밀하게 말했다.
"재일 한국인 야쿠자들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뭔가 음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김대중을 노리는 게 분명했다. 고국에서 아내도 그런 느낌을 수시로 보냈다.
"저들이 당신 때문에 두통을 앓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럴수록 귀국해서는 안 됩니다."
1973년 8월 8일은 도쿄도 무더위로 아침부터 끈적거렸다. 그날 낮 11시 김대중은 양일동 민주통일당 총재를 만나고자 그랜드팔레스호텔로 갔다. 김강수 비서와 함께 승강기를 타고 22층에 올라갔다. 22층 복도에는 앉을 만한 곳이 없기에 김 비서에게 아래층 로비에서 대기하라고 말한 뒤 양 총재가 묵고 있는 2211호실 문을 두드렸다.
양 총재가 반갑게 맞았다. 두 사람은 국내 정치상황과 시국문제를 나눴다.
"김 의원, 이제 그만 귀국하시지?"
"저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모두 어용 야당질이나 하고 있는데 제가 들어가서 뭘 하겠습니까? 오랜 망명생활을 하니까 자금이 궁합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양 총재가 문을 열자 김경인 의원이 나타났다. 김대중과는 친척 뻘이었다. 셋이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낮 1시 15분쯤 호텔방을 나섰다. 그때 어디선가 건장한 사네 대여섯 명이 뛰쳐나와 그 가운데 두 명이 김대중의 멱살을 잡았다. 김대중은 호통을 쳤다.
"무슨 짓이냐. 너희들은 누구냐?"
사내들은 김대중의 입을 틀어막고는 옆방으로 데려갔다.
▲ 당시 양일동 통일민주당 총재 | |
ⓒ 자료사진 |
양일동 총재의 웃음소리
그들은 옆방을 미리 빌려놓은 듯했다. 그들은 반항하는 김대중을 쓰러뜨린 뒤 손수건을 코에다 대고 눌렀다. 순간 그것이 마취제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순간 의식이 몽롱했다가 깨어났다.
"조용히 해. 말 안 들으면 죽여 버릴 거야."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순간 김대중은 '큰일이 벌어지겠구나!'라는 생각에 의식을 잃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문을 열어 호텔 복도를 살핀 뒤 김대중을 양쪽에서 끼고는 승강기 안으로 끌고 갔다. 승강기는 17층인가 18층에서 멈췄다. 젊은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김대중은 이때다 싶어 일본말로 고함쳤다.
"살인자다. 나를 구해 달라!"
그러자 두 남자는 7층에서 황급히 내렸다. 그들이 내리자 납치범들은 끼고 있던 팔을 옥죄더니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 지하로 내려가자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김대중을 뒷좌석으로 밀어 넣더니 양옆으로 한 명씩 타고 앞좌석에는 두 명이 탔다. 사내들은 그를 뒷좌석 바닥에 앉히더니 다리로 머리를 눌렀다. 곧 차는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김대중은 22층 호텔 방에서 지하로 추락한 기분이었다. 양일동 총재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감돌았다. 김대중을 태운 승용차는 어디론가 달렸다.
▲ 김대중 생가에 핀 무궁화 | |
ⓒ 박도 |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김대중 회고록>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및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