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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 생가 있는 하의도 가는 길 그리고 '목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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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790회   작성일Date 20-07-1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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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일제강점기, 해방, 군정, 전쟁, 분단의 시대를 살았다. 우리 역사에 이보다 더 험한 시기가 있었던가. 격랑, 격변, 격정의 세월이었다. 나는 세상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옳다고 여기면 정면으로 부딪혔다. 어떤 협박과 회유에도 꺾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 삶은 윤택하거나 고상하지 않다. (...)

    나는 정치를 심산유곡에 핀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라 여겼다. 악을 보고 행동하지 않는 은둔과 침묵은 기만이고 위선이다. 내가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인으로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늘 길 위에 있었기에 고단했지만 내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고 게으름을 경계했다. 지식의 정점에 서 있는 철학자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몸 바쳐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사당에 앉은 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 간 감옥에 있었고, 수십 년 동안 망명과 연금 생활을 했다.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 반란의 수괴, 망명객, 용공분자 등 나의 호칭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에는 큰 일이 있었다.

    정적들은 나를 '용공'으로 몰았다. 또 지역감정이 내 생을 따랐다. 벗어나려 몸부림칠수록 수렁 속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수없이 분노하고 좌절했고, 다시 수없이 인내하고 일어섰다. (...)

    나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공부했다. 숱한 시련과 실패 속에서도 내일을 준비했다. 죽음의 계곡에 떨어졌을 때도 절망하지 않았다. 두려워 울면서도 미래를 설계했다. 민족과 조국에 나를 바칠 그날을 기다렸다. 사형수와 대통령, 그것이 내 삶의 상징이다. 사형수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 기적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국민들이 일궈 낸 현대사의 기적일 것이다. (...)" - <김대중 자서전>  20~ 22쪽 '생의 끄트머리에서'

      

    ▲ 전남신안군 하의도 후광리 김대중 생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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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의도 행

    나는 2020년초부터 연재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그 절반을 훨씬 지났다. 초대부터 제18대 대통령까지 쓰기로 한 바, 그새 제14대까지 다뤘다. 지난 4월 26일, 거제도 김영삼 대통령 생가 탐방할 때 곧장 그 길로 하의도 김대중 생가 탐방을 계획했다. 하지만 거제도를 벗어나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 닿자 심신이 몹시 피폐했다. 그리하여 곧장 귀가하면서 하의도 김대중 생가 답사는 후일로 미뤘다.

    그동안 지도와 인터넷으로 거기로 가는 차량과 선박운항 시간을 점검하면서 하의도 행 날짜를 저울질했다. 그러는 새 7월이 됐다. 김대중 편 연재는 7월 중순으로 잡혀 있기에 아무튼 7월 초순에는 현지 답사를 떠나야 했다.

    좋은 답사가 되자면 첫째로 아무튼 날씨가 좋아야 했다. 장기 일기 예보를 보니까 7월 둘째 주부터는 장마로 접어든다기에 그 직전인 7월 3일과 4일로 확정지었다. 이전 답사와는 달리 여행가방을 최대한 줄였다. 하지만 이제는 고물이 된 무거운 구형 DSLR 디지털카메라는 그래도 보물단지처럼 가장 먼저 챙겼다. 플래시를 지참하느냐로 잠시 고민하다가 현지에서 후회할 것 같아 가방에 넣자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지난날 내 답사 가방에는 디지털카메라에 필름카메라, 거기다가 플래시, 망원렌즈, 그뿐 아니라 노트북에 스캐너까지 넣고 떠났다. 하지만 이제는 카메라 한 대조차도 부담스러운 나이가 돼 버렸다.

    그 언제부터 우리나라는 전국 일일 생활권이다. 하지만 강원도 원주에서 전남 신안군 하의도까지 당일로 다녀오기는 대중교통 편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1박 2일로 답사여정을 잡고, 지난 7월 3일 원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전행 버스에 올랐다. 온통 초록의 산하를 관통했다. 원주를 출발한 지 40여 분 지나자 '신니'라는 지명이 눈에 띄었다. 곰곰 생각하니 나의 마지막 스승이었던 이오덕 선생의 유택이 있는 곳이다. 내가 이 나이까지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은 그 어른의 알뜰한 가르침 때문이다.

    이오덕 선생님은 '좋은 글'이란 누구나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고 누누이 일러주셨다. 또한 사물을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자세와 글의 민주화를 몸소 가르쳐 주셨다. 차창을 통해 그 어른이 잠든 부용산 멧기슭을 향해 깊이 묵념을 드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가다듬는 새 곧 대전터미널에 닿았다.
      

    ▲ 만년의 김대중 대통령 부부 ⓒ 민화협

     
    목포행 완행열차

    서대전역으로 가서 오후 3시 48분에 출발하는 목포행 완행(무궁화호)열차에 올랐다. 여행은 완행열차가 제격이다. 그래야 깊이 생각할 수도, 사물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곧 계룡, 논산을 지나자 강경평야, 김제평야가 펼쳐졌다. '장고 끝에 둔 악수'란 말처럼 쾌청하리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차창에는 비가 뿌려졌다. 그런 탓인지 들에도, 길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하기는 지난날 모내기가 끝난 이즈음은 농사꾼의 휴가철이다.

    하지만 요즘 농촌에는 사람이 없다. 가장 일손이 필요한 모내기도, 추수도 모두 이앙기나 콤바인이 사람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농업 인구가 폴싹 줄어들었다. 그러니 들에도 사람이 드물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세상걱정을 하는 새 열차는 종착역 목포역에 닿았다. '호남선 종착역'이라는 표지석이 나그네를 반겨 맞았다.
     

    ▲ 목포역 구내의 '호남선종착역' 표지석 ⓒ 박도

       
    빗방울이 제법 굵다. 애초 그날 저물기 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어린시절 다녔다는 옛 목포공립제일보통학교(현 목포북초등학교)와 목포상고(현 목상고등학교), 그리고 항구도시 목포 시내 중심가를 한바퀴 둘러보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흐린 날씨로 그새 땅거미도 지고, 우장도 없기에 곧장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로 직행했다.

    최신의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 안은 적막강산이었다. 늦은 시간인데다가 코로나19 사태인 때문인가 보다. 요즘은 코로나사태로 대중교통 시간표는 들쭉날쭉하다. 현지 시간표를 확인하자 다행히 인터넷으로 조회한 시간과 같았다. 하의도 행 첫 배는 이튿날 새벽 5시 30분에 있었다. 거기서 가까운 밥집을 찾아 갈치조림으로 저녁밥을 야무지게 먹었다. 답사를 잘 하자면 잘 먹고 잘 자야 한다. 여객선 터미널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숙소에 들었다.

    긴 여로의 여독 탓인지 일찍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새벽 4시 30분. 곧장 세면을 하고 여장을 꾸린 뒤 5시 정각에 조용히 객사를 벗어났다. 간밤에 들린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 2층 매표소로 갔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5시 30분 출항 배라면 사람들로 붐빌 텐데 어쩐 일일까 놀랐다. 언저리를 살펴보니까 그곳은 페리호 매표소이고, 별도 매표소는 별관에 있다는 화살표 안내문이 보였다. 허겁지겁 거기 별관 매표소로 가자 5시 30분 직전. 하마터면 배편을 놓칠 뻔했다.

    승선에는 신분 확인이 철저했다. 내 주민등록증 확인은 물론 휴대전화번호 그리고 가족의 전화번호까지 기록하게 했다. 해난사고를 대비한 모양이다. 내가 마지막 승객으로 승선하자 곧 여객선은 부두를 벗어났다.

    내가 탄 신안농협 소속 연안여객선이 바다를 가르자 곧 눈에 익은 산이 보였다. 나는 1970년대 초 동료들과 함께 목포에 들러 유달산 노적봉, 삼학도 일대를 둘러본 적이 있었다. 나는 여객선 갑판에서 동승한 승객에게 빤히 보이는 산 이름을 묻자 내 예상대로 '유달산'이라고 답했다.
      

    ▲ 여객선 갑판에서 바라본 목포 유달산 ⓒ 박도

     
    목포의 눈물

    우리나라 어느 항구인들 애달픈 사연이 없으련만 목포항은 더욱 그렇다. 어느 항구나, 포구에는 이별의 엘레지(비가)나 사연이 많다. 나는 2007년 10월부터 2008년 5월까지 8개월 동안 구한말 호남의병장 스물 두 분의 발자취를 샅샅이 더듬은 바 있었다. 그때 광주 광산 오성술 의병장의 일화다.

    오성술 의병장은 16세 결혼하였지만 자식이 없었다. 오 의병장이 의병에 투신한 뒤로는 거의 집에 머물지 않았다. 부모로서는 후손이 없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 의병장은 외아들이었다.

    일군에게 체포되기 전 해(1908년), 마침 오 의병장 어머니는 마을 근처에 아들의 의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어머니는 부대로 찾아가 아들에게 집에 잠시 들러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아들은 차마 어머니의 청을 거역할 수 없어 집에 왔다.

    오 의병장이 옷 갈아입고자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며느리(금성 나씨)에게 방으로 들어가게 한 뒤 밖에서 문고리를 잠그고 치마로 방문을 가렸다. 그로부터 열 달 뒤 옥동자가 태어났다.
      

    ▲ 대구감옥에 수감된 호남 의병들(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오성술 의병장). ⓒ 눈빛출판사 제공

     
    오 의병장은 아이가 태어난 지 석 달 뒤 일본 헌병대에 붙들렸다. 그즈음 오 의병장은 광주감옥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됐다. 당시에는 내륙교통이 불편하여 광주에서 목포로 간 뒤 배를 타고 부산으로, 열차로 대구에 갔다고 한다. 그때 목포로 가는 영산강 나루터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이 세상에서 첫 상봉 겸 영결했다고 한다.

    갓난아이를 사이에 둔 부부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여보, 잘 가시오."
    "늙으신 부모와 어린 자식 잘 부탁하오."


    목포항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평야에서 공출한 쌀가마니들을 이 부두에 실은 뒤 일본 각지로 운송한 항구였다고 한다. 어디 목포항에서 쌀만 실려 갔으랴. 아무튼 지난날 목포항에는 이런저런 아픈 사연으로 눈물도 많았나 보다.

    그런 탓인지 목포를 배경으로 한 노래는 수없이 많다. '목포의 달밤' '목포의 연가' '내 고향 목포' '안개 낀 목포' '떠나온 목포'…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 때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은 단연 으뜸이다.

    나는 하의도 행 여객선 갑판 위에서 유달산, 삼학도를 살펴보면서 '목포의 눈물'을 마음 속으로 흥얼거렸다. 이른 아침, 하의도 행 여객선은 갈매기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잔잔한 바다 위를 시나브로 미끄러지듯이 목포항을 스멀스멀 떠나갔다. 
     

    ▲ 목포항연안여객터미널 ⓒ 박도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

    '목포의 눈물' 중에서
      

     

    ▲ 신안농협 소속 여객선이 목포 앞 바다를 가르며 하의도로 가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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