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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의 '5시간 19분' 필리버스터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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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217회   작성일Date 20-07-27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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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후를 토하는 젊은 날의 김대중 의원
    ▲  사자후를 토하는 젊은 날의 김대중 의원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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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국회의원에 당선되다

    자유당 정부는 돌연 제4대 대통령 선거를 1960년 3월 15일에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를 두고 신파와 구파의 싸움 후유증을 예견한 조기선거 전략이었다. 1959년 11월,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뽑았다. 정·부통령 후보는 불과 3표 차이로 결정됐다. 하지만 장면 박사의 깨끗한 승복으로 자유당이 바라던 후유증은 없었다.

    1960년 1월 29일 미국으로 건너가서 신병 치료를 받던 조병옥 박사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현지에서 운명했다. 4년 전, 신익희 후보의 불상사 재판이었다. 김대중은 장면 박사의 강원도당 책임자로서 전심 전력을 다해 선거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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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는 불법 무법 천지였다. 그 결과 4.19민주혁명을 불러왔다. 4.19 이후 새 헌법에 따라 제5대 민의원 선거와 제1대 참의원 선거가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됐다. 김대중은 다시 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민의원(현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그때부터 부재자 투표제도가 도입됐다. 외지인이었던 김대중에게는 직격탄이었다. 김대중은 자유당 토박이 후보에게 1000여 표 차로 졌다.

    민주당은 양원 모두에서 대승을 거둬 구파인 윤보선씨가 대통령이 되고, 신파 장면씨가 국무총리로 인준을 받았다. 장면 총리는 현역 의원이 아닌 김대중을 민주당 대변인으로 지명했다. 이에 김대중은 장면 정권의 입으로 맹활약했다. 그런 가운데 강원도 인제에서 당선한 국회의원이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사실이 밝혀져 의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리하여 1961년 5월 13일에 보궐선거를 치렀다. 김대중은 다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마침내 당선했다. 1954년 목포에서 낙선한 이래 1958년, 1959년, 1960년, 내리 네 번의 패배 만에 처음으로 당선되는 기쁨을 맛봤다. 5월 14일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민의원 당선증을 받자 만감이 교차했다. 세상을 떠난 아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김대중은 당선증을 쥐고 통곡했다.
      
     김대중-이희호 결혼사진
    ▲  김대중-이희호 결혼사진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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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동지를 아내로 맞다

    김대중은 5월 14, 15일 지친 몸을 이끌고 당선 인사를 다녔다. 15일 밤늦도록 당선사례를 하고 5월 16일 아침, 단잠을 자고 있는데 한 당원이 잠을 깨웠다. 서울에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전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회를 해산했다. 김대중은 의원 배지 한 번 달아보지 못한 채 백수가 됐다. 그때의 참담함이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1962년 5월 10일, 김대중은 이희호와 결혼했다. 이희호는 서울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화여고와 이화여전 문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한 인재였다. YWCA 총본부 외교국장으로 활동하다가 미국 램버스대학에서 사회학을 수학하고, 스카렛대학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YWCA연합회 총무를 맡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은 집안이나 학벌 등, 결혼조건이 맞지 않는, 세속적인 이해관계로는 쉽게 이뤄질 수 없는 결혼이었다.
     
    그 사람, 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셋방에는 앓아누운 여동생도 있었다. 또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재수생이었다.

    1954년 처음 정치에 투신해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후, 한 번은 후보 등록이 취소되었고, 세 번이나 고배를 마신 좌절의 연속이었다. 1961년 5월 13일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되었으나 사흘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어버렸다. 그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장면 내각에서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던 경력 때문에 검거되어 두 차례에 걸쳐 3개월간 구속된 억세게 운이 나쁜 남자였다.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는 큰 꿈과 열정이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당연히 주위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가족은 물론 친지,  YWCA, 여성계 선후배들이 극구 만류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이 존재 이유였다. 우리는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 이희호 지음  <동행> 65~68쪽 축약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이희호는 그의 자서전 <동행>에서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세게 노크했다"고 당시의 심정을 솔직담백하게 고백했다. 이들 부부의 인생길은 가시밭의 연속이었다.
      
     DJ 생가 부조물
    ▲  DJ 생가 부조물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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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둥이만 산 놈!"

    1963년 2월, 중앙정보부의 한 간부가 정치 활동이 금지에 묶인 DJ에게 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달라고 제의했다.

    "당신은 실력 있고 유능하다. 우리가 중용, 우대할 테니 같이 갑시다."

    김대중은 이를 거부했다.

    "나는 당신들이 쿠데타로 쓰러뜨린 민주당 대변인을 지냈소. 장면 정권이 부정부패하고 나빠서 당신들이 일어났다고 말하는데, 나는 장면 정권이 역사상 가장 좋은 정권이니까 지지해달라 말하고 다녔소. 이제 내가 거꾸로 당신네가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국민들이 나를 변절자로 손가락질 할 것이오. 변절자를 영입해서 당신네들이 득 볼 게 뭐가 있겠소."

    그 옆방에는 JP가 면담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정 간부는 JP와 만남을 주선했지만 김대중은 한 마디 하고 일어섰다.

    "할 말은 다한 것 같으니 일어나 보겠소."

    그러자 중정 간부는 김대중의 뒤통수를 향해 뱉었다.

    "주둥이만 산 놈!"
     
     국회의사당에서 발언하는 김대중 의원
    ▲  국회의사당에서 발언하는 김대중 의원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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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에서 금배지를 달다

    제5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김대중은 고향인 목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공화당에서는 차아무개를 후보로 내세웠다. 선거전에 돌입하자 김대중은 목포시민들에게 외쳤다.
     
    "저는 목포의 아들인데도 객지를 떠돌았습니다. 목포에서 가장 먼 곳,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여 천신만고 끝에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또한 집권 여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강원도도 저를 알아주고, 서울에서도 저를 인정해 주는데, 고향에 돌아온 저를 목포 시민들이 외면해서야 되겠습니까? 고향에서 패하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저를 키워주십시오. 큰 인물이 돼 보답하겠습니다." 
     김대중 정치적 고향인 목포.
    ▲  김대중 정치적 고향인 목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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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막바지로 갈수록 혼탁해졌다. 공화당은 경찰과 지방공무원을 동원해 야당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그때 한 의인이 나타났다. 그는 부정선거 지시를 받은 목포경찰서 정보반장 나아무개 경사로 '국회의원 선거대책'이란 부정선거 비밀지령문을 폭로했다. 야권은 일제히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선거 보이콧까지 거론하면서 내무부장관, 치안국장을 사임시키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김대중은 큰 표차로 고향 목포에서 당선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전국적으로 압승했다. 전국구를 포함 110석을 차지했다. 야권에서는 민정당이 41석, 김대중이 속한 민주당이 13석, 여당 성향의 자유민주당이 9석을 획득했다.

    1964년 4월 21일, 공화당은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을 상정했다. 김준연 의원은 국회에서 한일협정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 오히라 외상이 접촉할 때 정치자금으로 1억30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러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박 정권은 김 의원을 구속하려고 공언했다.

    하루가 지나 국회가 폐회하면 국회 동의 없이도 구속할 수 있었다. 그때 한건수 원내총무가 김대중 의원에게 부탁했다.

    "김 의원, 지금 낭산(김준연의 호) 선생에 대한 구속동의안 상정을 여당이 밀어붙이고 있소. 당신이 나서 줘야겠소. 안건 처리를 못하도록 오늘 밤 자정까지 끌어달라는 말이오."
    "일반 안건 가지고도 1시간 끌기 어려운데 어떻게 의사진행 발언으로 몇 시간을 끈단 말이오."
    "그러니까 김 의원이 나서 달라는 것 아니오. 당신이면 할 수 있다고 중진의원까지도 합의를 받으니 발언대에 오르시오."


    김대중은 떠밀리다시피 발언대에 올랐다. 그의 발언을 지켜보던 공화당 의원들은 '김대중이 지금 필리버스터(Filbuster, 의사진행 방해)를 하고 있으니 대책을 세우자'고 수뇌부에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공화당 원내총무 김용태는 이를 무시했다.

    "놔두시오. 해봤자 얼마나 버티겠소. 제 풀에 지칠 것이오. 1시간도 못할 테니 놔두시오."

    하지만 김대중의 의사진행 발언은 해가 저물어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그날 그의 발언시간은 5시간 19분으로 훗날 기네스북에도 국회 최장 발언시간으로 기록됐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김대중 회고록>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및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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