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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의 잔인한 계절... 연이은 낙선, 첫 반려자까지 떠나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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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기념사업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656회   작성일Date 20-07-24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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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날의 김대중
      젊은날의 김대중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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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계에 발을 들여놓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날 김대중은 사업 차 서울에 있었다. 그는 용케 마포나루에서 한강을 건넜다. 거기서 400여 km 떨어진 목포까지 걸어서 20일 만에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대문 앞에서 아들을 반겨 맞았다. 아내 차용애 여사와 갓난아이는 자기 배의 선장이 돌봐주고 있었다. 목포경찰서에서 인민군 정치보위부 장교로부터 호된 취조를 받은 뒤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때, 김대중은 목포형무소에서 풀려났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목포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배 3척 중, 한 척은 당국에 징발 당했고, 다른 한 척은 폭격으로 파손되고 남은 한 척으로 새로 시작했다.

    김대중은 곧 재기했다. 그가 전쟁 포화 속에서 빨리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경제의 흐름을 파악한 탓이요, 둘째는 적당한 모험을 한 탓이요, 셋째는 종업원들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곧 목포일보사까지 인수했다.
      

     하의 초등학교에 세워진 김대중 동상
      하의 초등학교에 세워진 김대중 동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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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다.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천도했다. 김대중은 사업기반을 목포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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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5월 26일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젊은이들은 38선을 오르내리며 죽어가고 있건만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치졸한 정치 작태가 벌어졌다. 사건은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의원들이 대거 당선됨으로 비롯됐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뽑았다. 그런데 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재집권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선거제도로 바꾸려 했다. 그러려면 의원들을 포섭해 헌법을 개정해야 했다. 이 대통령은 자유당을 새로 만들었다. 야당 측은 대통령 중심제 대신에 아예 의원 내각제로 바꾸려고 했다.

    이런 기류를 감지한 이 대통령 측은 직접 선거를 촉구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폭력조직과 우익단체들이 배후에서 조종해 국민의 뜻이라면서 국회의사당을 포위했다. 마침내 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체포했다. 체포한 야당 의원들에게는 국제공산당원이라는 올가미를 씌웠다.
       

     김대중, 목포에서 민의원 출마기념 사진(맨 앞줄 중앙).
      김대중, 목포에서 민의원 출마기념 사진(맨 앞줄 중앙).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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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다

    이런 상황에서 장택상 국무총리가 대통령은 직접 선거, 국회는 이원제로 구성한다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내놔 이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 무렵 김대중은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1954년 목포에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다. 투표 결과 10명의 후보 가운데 5등을 했다. 비록 선거에서는 패했지만 많은 것을 깨쳤다. 정당 기반 없이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또 당시 선거에는 돈이 엄청나게 들었다. 시루에 물 퍼붓기였다.

    선거 이듬해인 1955년, 김대중은 큰 꿈을 펴고자 서울로 갔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집을 마련하고 아내는 호구지책으로 미장원을 차렸다. 김대중은 삼각지 근처의 한국노동문제연구소로 출근했다. 

    월간 잡지 <신세계>의 주간도 맡았다. 이와는 별도로 '동양웅변전문학원'을 운영했다. 당시 웅변은 정치인의 최대 무기였다. 그때 훗날 정치적 동지 김상현, 김장곤 의원도 그곳에서 만났다.

    1956년 3월 공화당이 창당됐다. 장택상, 이범석 등을 최고위원으로 추대했다. 장택상 최고위원은 김대중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공화당은 창당 후 최고위원간에 노선 갈등이 빚어졌는데, 그때 당원들이 무더기로 탈당했다. 김대중도 그때 탈당했다. 
      

     DJ 생가 건넌방
      DJ 생가 건넌방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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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신자가 되다

    1956년 5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이승만, 신익희 두 후보간의 대결이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이기붕, 장면이 출마했다. 신익희 후보는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국민들과 야당 연합세력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평화적 정권 교체의 국민적 열망은 선거 열흘 전에 물거품이 됐다. 신익희 후보가 전북 지방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사망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 선거에서 민주당 장면 후보가 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김대중은 장면 부통령을 대부로 모시고 가톨릭 신자가 됐다. 1956년 6월, 명동성당 노기남 대주교실에서 장면 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림동성당 김철규 신부가 집전했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Thomas More)였다.

    김대중은 장면 부통령과 이런 인연으로 그해 9월 민주당에 입당했다. 장면 부통령이 이끄는 신파에 속했다. 입당 후 얼마 되지 않아 장 부통령 저격 사건이 발생했다. 김대중은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 암담한 정치 현실에 분노했다.

    1958년 봄, 다시 국회의원 선거철이 돌아왔다. 하지만 김대중은 목포에서 출마할 수 없었다. 이미 민주당 정중섭이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리 끝에 휴전선 근처인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기로 했다. 하지만 자유당 측의 후보 등록 방해로 김대중은 선거판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자유당은 전국에서 압승을 거뒀다. 김대중은 선거 후 곧바로 '후보 등록 방해사건'을 법원에 제소해 1959년 3월 재판에서 이겼다. 그렇게 하여 김대중은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그러자 상대 측은 "김대중은 공산당원입니다"라고 몰아붙였다. 유권자들은 새빨간 거짓말을 믿었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DJ 생가 부조물 벽화
      DJ 생가 부조물 벽화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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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를 잃다
      
    1954년 목포, 1958·1959년 인제에서 거듭 떨어졌다. 출마는 곧 돈이었다. 한 번만 출마해도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것이 선거였다. 세 번의 선거를 치르자 집안에는 땟거리조차 없었다. 집에 있기가 민망했다. 무작정 버스를 타면 내릴 곳이 없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있었지만 주머니가 빈털터리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때 김대중은 그렇게 하루하루 세월을 보냈다. 

    그런 생활고를 겪고 있을 때 자유당에서 입당 제의가 왔다. 돈과 자리를 제시했다. 당시에는 야당에 대한 탄압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여당으로 옮기는 국회의원들도 속출했다. 의원도 아닌 그가 그런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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