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생가 본채와 방앗간 | |
ⓒ 박도 |
아름다운 국토
2020년 7월 4일 오전 5시 30분 하의도 행 여객선은 목포항을 출발했다. 여객선은 여러 낙도 사이의 호수와 같은 바다를 사뿐히 갈랐다. 우리 국토를 기행하면서 매번 느낀 바, 참으로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나라다. 특히 이웃 일본과 우리나라 산하를 견줘보면 쌀밥과 보리밥의 차이다.
일본의 산하는 어딘가 거무튀튀하고 토양이 척박한 인상이다. 또한 산들의 모양새가 날카롭다. 그에 견주면 우리 산하는 토양이 기름지고 산의 모양새가 부드럽다. 게다가 일본은 걸핏하면 지진, 태풍, 쓰나미 등 자연 재해가 잦다. 그래서 그네들의 삶은 늘 불안한가 생각한다. 이에 견주면 우리나라의 자연재해는 그네보다 한결 덜하다.
그런 까닭으로 일본인들은 오래 전부터 대륙 정벌의 꿈을 호랑이 발톱처럼 숨겨왔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항으로 서양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뒤 부국강병을 이루자 1910년에 한반도를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를 견제한 미국, 러시아 등 강대국에게 힘이 딸려 1945년 일본은 집어삼킨 한반도를 고스란히 게워 놓았다.
▲ 다도해에서 바라본 목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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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미국과 소련 두 나라는 한반도를 전리품으로 북위 38선을 경계로 시루떡 자르듯 싹둑 잘라 자기네 판도에 넣었다. 그 북위 38도선이 한 차례 전쟁을 겪고 난 뒤 구불구불한 휴전선(DMZ)으로 변했다. 한반도는 1945년 허리를 잘린 그날 이후, 아직도 잇지 못한 분단 상태다.
하의도행 갑판 위에서 아름다운 국토를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는 새 여객선은 하의도 나루에 닿았다. 그때가 오전 7시 40분으로 2시간 남짓 걸렸다. 하의도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표지석이었다.
하의도에서 내려 표지석 사진 촬영을 마치고 매표소로 갔다. 먼저 목포행 여객선 출항시간을 묻자 오후 1시 30분과 오후 4시 30분에 있단다. 매표원에게 하의도 택시를 부탁하자 그는 즉석에서 기사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주말인지라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서 아마도 기사는 뭍(목포)으로 나간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아찔했다.
▲ 하의도 표지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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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버스'
그제야 부두에 보니 주차된 차(버스)는 그새 보이지 않았다. 매표원에 따르면 포구에서 생가까지는 3km 정도로 40~50분 걸으면 닿을 수 있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걷기로 작정을 하고 식전이라 우선 가까운 밥집에 들렀다.
매표소에서 가까운 중앙식당 주인은 이른 아침에 찾아온 외지인을 용케 알아봤다. 그는 내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말한 다음 차편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손 전화 다이얼을 누른 뒤 말했다.
"걱정 마시오. 식사 끝날 때쯤 차가 일로 올 것이오."
나는 그 말이 복음처럼 반가웠다. '말 타면 종 두고 싶다'는 말처럼 나는 소년 김대중이 서당에 다니다가 하의보통학교에 입학했다는 그 말이 떠올라 밥집 주인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거기서 가깝다고 일러줬다.
아침 밥숟갈을 놓자 크랙션 소리가 울렸다. 곧장 밖으로 나가자 '1004버스'라는 승합차 앞에서 한 여인이 미소로 반겼다.
▲ 하의초등학교 교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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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초등학교는 밥집에서 가까웠다. 교정 한편에는 김대중 대통령 동상이 서 있었다. 예사 답사 때처럼 하의초등학교 교정 여기저기를 카메라에 담은 뒤 차에 올랐다. 그때부터 잔뜩 흐린 하늘은 소리없이 이슬비를 쏟았다. 하의도의 웬만한 소로도 뭍의 다른 고장처럼 모두 포장이 됐다. 그 길을 1004버스는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오전 8시 40분, 마침내 하의도 후광리 마을 김대중 생가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인데다가 비까지 내린 탓으로 그 일대는 한층 더 고즈넉했다. 1004버스 기사는 자기가 대기하고 있으면 내 마음이 바빠진다면서, 그 사이 다른 손님을 모신 뒤 곧장 오겠다고 말하면서 떠났다. 그의 세심한 배려심에 감동했다. 나는 먼저 추모관에 들러 묵념 후 사진촬영을 하는데 한 여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곳은 출입금지라요."
▲ 추모관 내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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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후딱 추모관을 나오면서 그에게 미처 몰랐다고 사죄했다. 그는 생가 관리인이라면서 고무장갑을 낀 채 여기저기를 청소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관리인의 안내를 받으면서 생가 곳곳을 둘러봤다. 200평 남짓한 김대중 생가는 모두 초가로 본채, 아래 채 및 방앗간과 창고 그리고 헛간 겸 측간(화장실)으로, 한 세기 전의 여느 시골 여염집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조촐하고 정갈하게 생가를 복원해놨다.
▲ 바깥에서 바라본 김대중 생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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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도의 기적'
나는 안방, 건넌방, 아래 채 방앗간, 측간 등을 둘러보면서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생가 안팎을 둘러보자 바다가 보고 싶었다. 아마도 소년 김대중은 날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뭍에 대한 그리움과 청운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내가 바다에 가고자 집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관리인은 굳이 집 뒷길로 가라고 일렀다. 내가 그 길로 오르자 곧 유스호스텔이 나왔고, 소나무가 우거진 야트막한 동산이 이어졌다. 동산 소나무 숲에서 까치 한 쌍이 나를 향해 번갈아 크게 지저귀었다.
"이 우중에 먼 길을 오셨습니다."
"아, 어찌 예까지 오셨소. 반갑습니다."
▲ 생가에서 바라본 개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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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까치들의 환영인사에 손을 들어 답한 뒤 곧장 바닷가로 갔다. 그 시간은 썰물 때로 바다는 온통 개펄이었다. 다시 역순으로 생가로 돌아오는데 까치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또 한참 뭐라고 지저귀었다. 아마도 잘 가라는 환송인사 같았다. 그런데 그의 지저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까치를 향해 다시 손들어 답례했다.
나는 생가로 돌아온 뒤 다시 언저리를 둘러보면서 카메라 셔터를 부지런히 눌렀다. 추모관에는 방명록이 있었다. 내 이름을 쓰자 그 옆에 방문소감란이 있었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른 말은 '낙도의 기적'이었다. 이 외진 하의도의 소년이 대통령에 오른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주차장에는 그새 1004버스가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을 조금 넘고 있었다.
▲ 1004 버스와 기사 조말례 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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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시는 이른 아침에, 연세도 술찮은 분이 어디서 오셨다요?"
"강원도 원주에서 왔습니다."
"오메, 아주 멀리서 오셨구먼요."
기사는 자신의 이름은 조말례로 올해 61세라고 수줍게 소개했다. 신안군에서는 버스가 미처 닿지 않는 낙도 사람들의 위해 '1004버스'를 별도로 운영한다고 했다.
"하의도 사람들은 염전과 농업, 어업 등으로 농가소득이 수월찮아요."
조 기사는 하의도사람들의 이런저런 생활상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시간 여유가 많다면서 하의도 일대를 두루 보여줬다. 아마도 주인을 대신하고 싶은 마음씨였나 보다.
이슬비가 내리는 하의도는 선경이었다. 특별히 그곳 명소 큰바위얼굴도 안내했다. 그런 뒤 이웃 신의도 포구로 가면 11시에 목포로 나가는 여객선이 있다면서 그곳까지 데려다 줬다.
차비는 손님이 알아서 요금함에 넣으라고 했다. 낙심 끝에 만난 행운이었다. 조 기사 덕분에 짧은 시간임에도 하의도 구석구석을 알뜰히 살펴볼 수 있었다. 11시 신의동 포구에서 목포행 여객선을 탔다.
▲ "큰바위얼굴" 앞에 선 김대중 내외의 사진 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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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소년
나는 전라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1924년 1월 6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인이 두 사람이었고, 내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다. 아버지는 첫 부인과는 1남3녀를, 둘째 부인과는 3남1녀를 두셨다.
그러니까 나는 어머니의 장남이자 아버지의 차남이었다. 어머니는 큰집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 살았다. 그 삶이 곤궁하였다. 나는 큰집과 어머니 집을 오가며 자랐다.
아버지(김운식)는 농사를 지으며 마을의 구장 직을 맡고 있었다. 구장 집이라고 하여 <매일신문>이 배달되었다. 나는 서당에서 익힌 한자 실력으로 어려서부터 신문을 읽었다. 그 신문을 통해 만주사변, 조선총독부 동정, 국내의 농촌 이야기, 문화 등 새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장수금)께서는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으셨다. 특히 나에게는 헌신적이었다.
"우리 대중이가 공부를 곧잘 하니 여기서 썩히지 말고 목포로 갑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하의 보통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이사했다. 1936년 가을, 나는 청운의 뜻을 품고 마침내 목포행 배에 올랐다.
- 이상 <김대중 자서전> 27-40쪽 축약
▲ 김대중 생가 건넌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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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군 낙도를 누비는 연안여객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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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김대중 회고록>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및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