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가슴에 살아있는 평화주의자, 영원한 그 이름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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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김대중은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주창했다.
시대의 고난·역경 온몸에 지고
“내가 선택한 길, 불평·후회 없어”
항상 독서하고 성찰했던 정치가
옥중편지에 담긴 철학 경이로워
1980년 2월, 나는 김대중(金大中·1924~2009)의 옥중편지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편집·교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함석헌·윤보선·문익환·안병무·서남동·이문영 등 재야인사들과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박정희 유신권력은 이를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몰아 참여인사들을 구속했다.
김대중은 5년형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가족들에게 ‘옥중편지’를 써보냈다. 다시 서울대병원의 ‘특별감방’에서 편지를 내보냈다. 험난한 시대의 고단한 정치역정을 헤쳐나가고 있는 정치가 김대중의 정신과 삶의 진면을 보여주는 기록들이었다. 면벽의 한계상황에서 써보낸 편지, 봉함엽서의 안팎 모든 여백에 깨알같이 적은 그 내용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나는 그 편지글을 200자 원고지에 옮겨 적었는데, 어떤 편지는 40장이 넘었다. 소식과 안부를 묻는 여느 편지가 아니었다. 한 정치가의 정치적 구상이었다. 독서하고 성찰하는 한 정치가의 역사탐구이자 문명비판이었다. 철학이고 사상이었다. 시대의 고난과 역경을 온몸에 지고, 당당하게 대처해나가는 한 인간의 용기가 아름다웠다.
“나는 매일 기도와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이 신념으로 택한 길이기 때문에, 불평과 후회 없이 조용한 마음으로 걸어가겠습니다.”
■ 수도는 전방에 위치해야
한길사에서 펴낸 <한국사> 전 27권 출간기념으로 1994년에 개설된 한국사대학에서 김대중은 ‘내가 보는 한국사’를 주제로 특강했다.
유신정부 행정수도 이전 발표에
“수도는 전방에 둬야” 역사적 통찰
전두환 신군부의 사형선고에
“원망 안 해…원수조차 용서해야”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유신정부는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옮기는 계획을 발표했다. 옥중의 김대중은 이 발상을 세계사의 예를 들면서 비판했다. ‘수도’란 무엇이며 수도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그의 역사적 통찰에 나는 놀랐다.
“베를린은 독일의 가장 동쪽에 있습니다. 10세기 이후 서구 기독교 세계의 가장 큰 위협인 러시아에 대해서 프러시아는 그 방위의 일선이었으며, 따라서 그 수도인 베를린은 통일 후에도 수도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중국의 역대 제도(帝都)의 위치 역시 교훈적입니다. 주·진·한·수·당·송은 모두 북방 황하유역에 도읍했습니다. 이것은 중국에 침략해온 서융·북적 등에 대처해서였습니다. 북경은 북방 종족에 대한 전방 보루로서 청조 말까지 수도였습니다.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만주 쪽에서 침입해오는 일본 세력을 두고도 남경으로 천도한 것은 이미 그 장래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마땅히 수도를 북으로 전진시켜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둔 당과 대결하고 함경도 전체와 평안도 태반을 차지한 발해에 대처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백제는 광주를 수도로 정했다가 공주·부여 등 남으로 피해만 내려갔습니다.”
한반도 북쪽과 만주 땅의 절반, 시베리아까지 차지한 고구려는 최초의 수도인 통구에서 20대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했다. 우리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지만, 멸망하기 200년 전에 저 넓은 만주보다 한반도를 중시한 고구려 지도부의 안타까운 심리상태를 김대중은 옥중편지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것은 민족이나 국가나 개인이나 피할 수 없는 시련 앞에 가슴을 펴고, 용감하고 슬기로운 응전을 한 자만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1980년 5월18일 민주항쟁에 나선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로 몬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지식인들의 시국선언에 조력했다고 나도 조사받아야 했다. 옥중편지의 출간도 좌절되고 말았다.
■ 하느님 앞에 가장 강한 사람만이 용서
1981년 11월23일 전두환 신군부의 대법원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선고를 받고 내보낸 편지는 우리 모두의 고통이고 슬픔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것이 나의 믿음을 지탱하는 최대의 힘입니다. 언제나 눈을 그분에게 고정하고 결코 그분의 옷소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용서하자고 한다.
“사랑하는 홍걸아! 아버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원수조차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하느님 앞에 가장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감옥 생활 6년 동안 김대중에게 집필의 자유가 허용됐다면 대단한 명저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그의 ‘옥중편지’를 읽으면서 새삼 야만적인 우리 교도정책을 실감하게 된다.
나는 1981년 네루(1889~1964)의 명저 <인도의 발견>을 펴낸다. 1941년 4월부터 8월까지, 아흐마드나가르 요새의 감옥에서 집필된 <인도의 발견>은 인도의 문화와 전통과 사상을 인도의 주체적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는, 간디와 함께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네루의 민족주의 사관을 담아내고 있다.
한국의 정치지도자 김대중과 더불어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넬슨 만델라(1918~2013)가 있다. 한길사는 1984년 무크지 ‘제3세계연구’를 통해 만델라를 크게 다룬다. 1964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그때 케이프타운 근교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1965년 영국에서 출간된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고난의 발걸음>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김대중과 만델라는 긴 고난을 이겨내고 승리한다. 만델라는 1990년 27년 만에 석방되고 1993년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이어 1994년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아프리카 흑인운동의 위대한 승리였다. 김대중은 죽음을 넘고 넘어 1998년 대통령이 된다.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과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낸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김대중과 만델라는 인간정신·평화정신을 세계인에게 심는 리더십을 구현했다. 두 평화주의자가 희망으로 인류의 가슴에 살아 있다.
■ 행복하려면 빵·자유 함께 있어야
1989년 한길사는 월간 ‘사회와 사상’ 창간 특집으로 ‘현 단계 민족통일운동의 실천전략’을 기획한다. 이 특집의 일환인 ‘3단계 통일방안의 제창’은 통일운동가 김대중이 저간에 연구한 통일방략을 다시 천명하는 것이었다. 1971년 대통령에 출마할 때부터 그는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을 주창해왔다.
김대중은 남한에서의 민주정부 수립 없이는 통일에의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민주정부 아래서만 민족의 분단이 집권자의 야망에 악용당하지 않도록 국민이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통일을 원하면 원할수록 대한민국에서 확고한 민주체제 수립에 최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민주발전을 등한시한 통일논의는 환상이요 낭만에 불과하다.”
한길사는 1994년 1월 김대중의 <나의 길 나의 사상>을 펴낸다. 정치가 김대중의 사상과 철학, 이론과 정책을 종합해 보여준다. 민주주의와 평화가 왜 중요하며 민족의 통일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논구한다. 문명비평가로서 20세기를 회고하고 21세기를 전망한다.
나는 대형의 새 원고 ‘우리 민족을 말한다’를 기획했다. 고려대 강만길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김대중의 사상과 이론을 새롭게 구체화하고 싶었다.
“나는 유물론도 유심론도 잘못이고, 물과 심은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만 주장하는 것은 왼쪽 절름발이고 빵만 주장하는 것은 오른쪽 절름발이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빵과 자유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자유와 정의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사회적으로는 복지를, 철학적으로는 유물론과 유심론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북이 분단된 것은 이념이나 계급투쟁 때문이 아니고 문화와 종교가 다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외세가 우리 민족을 갈라놓았습니다. 우리는 민족과 이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엄청난 수난을 당하면서도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정의와 통일을 위한 길을 걸어왔다.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타일렀습니다. 나는 최소한 역사에서의 나의 승리를 알고 죽는다, 바르게 산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역사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한 번 죽는 것이 아닌가, 역사에서 승자가 된다는 사실을 믿고 죽을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제는 민주주의가 자기 국경을 넘어서 이웃과 세계의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김대중의 이론이고 사상이다. ‘국민국가 민주주의’로부터 주변 국가들을 포함한 ‘연방제 민주주의’, 전 세계를 포함하는 ‘세계적 민주주의’ 삼중 구조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 국민의 자유, 내 국민의 복지만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한계에 왔습니다. 이제 철학이 달라져야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자연의 존재들, 동식물과 흙과 땅과 물과 공기의 생존과 번영도 보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를 수탈하고 학대하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귀 기울여 듣고 눈여겨보면, 지구상의 만물들이 사람들 때문에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귀를 쟁쟁히 찌릅니다. 우리의 어머니인 지구에게 감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지구 위의 만물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 친일파들이 청산되지 않은 해방 후 역사
1994년 <나의 길 나의 사상>을 펴내면서 김대중은 ‘우리 민족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강만길 교수와 대담했다.
“평화통일은 우리 권리이자 의무”
평화 공존·교류·통일 방안 주창
1986년 한길사 창립 10주년을 맞으면서 나는 우리 민족사의 발전과정을 집대성하는 전 27권의 <한국사>를 기획한다. 필자 170명이 참여하는 한길사의 <한국사>는 기획을 시작한 지 8년 만인 1994년 봄 동시 출간된다. <한국사>의 간행을 기념하여 나는 ‘한국사대학’을 열었다. <한국사> 편집위원과 필자들이 독자와 만나 강의하고 토론하는 것이었다. 그해 6월부터 10월 말까지 총 72강좌였다. 역사연구자들과 지식 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역사연찬의 축제마당이었다.
나는 김대중 선생의 특강 ‘내가 보는 한국사’를 기획했다. 선생은 특강하는 날 나의 사무실에 들러 ‘사인여천’(事人如天)을 휘호해주었다. 강남출판문화센터를 입추의 여지도 없이 채운 그날 저녁 두 시간 반 동안 진행된 강연에서 선생은 자신의 민족사의 이상과 현실을 풀어냈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만들었고 석굴암은 김대성이 만들었으며, 경복궁은 대원군이 건축했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이것은 잘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허구입니다. 진실한 건설자는 그들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석수, 목수, 화공 등 백성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정확히 깨달을 때 이름 없는 백성들에 대한 외경심과 역사의 참된 주인에 대한 자각을 새로이 하게 됩니다.”
김대중은 우리 역사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숨져간 의인들을 안타까워한다.
“우리 역사에서 개혁적인 일을 하려던 사람들이 목숨을 온전히 부지한 예가 없습니다. 중국·한국·일본의 해상을 지배한 장보고는 국정을 개혁하려다가 부패한 귀족의 음모로 암살당했습니다. 고구려 구토 수복의 큰 뜻을 안고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려 했던 묘청도 역시 귀족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있느냐, 좋은 정치 해보자고 일어선 만적의 노예해방 투쟁은 로마 스파르타쿠스의 난 같은 것에 비교가 안 됩니다. 뚜렷한 목표와 이념을 가지고 있었던 세계에 보기 드문 노예해방 투쟁이었습니다. 고려 말엽의 신돈은 민중들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았지만 참혹한 죽음을 맞았을 뿐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 의해 온갖 매도를 당했습니다. 동족을 못살게 굴던 친일파들이 해방된 후에도 여전히 지배자로 군림해왔습니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자들이 우리 경찰을 장악했고, 일제하에서 검찰과 판사를 하면서 악질적인 행동을 하던 사람들이 사법부를 장악했습니다. 천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을 다해라,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떠들어대던 자들이 우리의 문화계·교육계·예술계를 장악했습니다. 참으로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날의 강연에서 김대중 선생은 ‘통일문제’로 마무리했다. 통일은 그의 모든 글과 강연과 담론에서 반드시 논급되는 주제다. 통일작업은 통일운동가 김대중의 생의 당위였다.
“통일은 우리의 권리입니다. 우리는 전쟁범죄 국가가 아닙니다. 독일처럼 외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독일조차 통일했습니다. 왜 우리는 못 합니까.”
2006년 10월 서울대 개교 60주년을 기념하여 개소된 통일평화연구소 초청강연회에서 김대중 선생은 북한의 핵실험은 미국과 북한의 공동책임이라면서 자신의 평화통일 방안을 재천명한다.
“우리의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야 합니다. 남도 좋고 북도 좋은, 공동승리의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총을 들고 조국방위라는 이름 아래 동족상잔의 전쟁에 나서지 않는 그런 통일을 해야 합니다. 평화적 공존과 평화적 통일만 한다면 우리는 세계 속에 우뚝 솟는 큰 봉우리가 됩니다. ‘철의 실크로드’가 부산항에서 파리·런던까지 연결되도록 합시다. ‘압록강의 기적’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합시다.”
<시리즈 끝>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김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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