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사 전쟁 같았던 선거, 김대중이 띄운 승부수
페이지 정보
본문
▲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 벽보 ⓒ 자료사진
목포의 전쟁
1967년 6월 8일은 제7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재선을 노렸다. 그런데 불길한 소문이 돌았다. 정부 여당이 김대중을 낙선시키려 하는데, 그 맨 앞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간부를 청와대로 불러 지시했다고 한다.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낙선시켜야 한다. 여당 후보는 열 명이나 스무 명은 떨어져도 상관없다. 김대중만은 절대 당선시켜서는 안 된다.”
목포는 선거전에 돌입하기 전부터 가장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상대는 육군소장 출신으로 체신부장관을 지낸 김병삼 후보였다. 그는 지역을 누비면서 목포 발전을 위해 자신이 꼭 당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목포역 광장에서 1만 명을 모아 놓고 여당 후보 지지 연설을 했다. 언론은 연일 목포 선거를 대서특필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목포의 전쟁’이라 불렀다.
목포 시민들의 관심은 박 대통령이 왜 김대중을 집요하게 쓰러뜨리려 하느냐로 옮겨갔다. 마침내 목포 시민들은 김대중은 대통령 감이기에 미리 그 싹을 자르기 위한 술책이라고 여겼다. 김병삼 후보 측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만큼은 여당 후보를 내자. 이다음 선거에는 김대중을 다시 밀어주자. 김대중이 당선되면 목포는 망한다.”
하지만 김대중의 유세장에는 인산인해로 사람들이 몰렸다. 김대중은 외쳤다.
“유달산이여! 삼학도여! 영산강이여! 이 김대중이를 지켜 달라!”
김대중은 흡사 전쟁과 같은 선거를 치렀다. 개표 결과 김대중 후보가 6천여 표차로 당선됐다. 관권에 대한 민권의 승리였다. 김대중은 목포 시민들에게 당선 인사를 했다.
“여러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앞으로 대통령에 도전하겠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세계의 김대중이 되겠습니다.”
▲ 사자후를 토하는 DJ ⓒ 자료사진
3선 개헌과 ‘40대 기수론’
1969년 7월 19일 ‘3선 개헌반대 시국강연회’가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당국은 이 강연회를 집요하게 방해했다. 하지만 그날 유세장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마침내 김대중은 포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박정희 씨에게 충고하고 호소합니다. 박정희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편의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 할 자격이 있으면, 당신에게 4.19와 6.25 때 죽은 영령들 주검의 값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선 개헌은 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기어이 3선 개헌을 강행했다가는 당신은 제2의 이승만이 되고, 공화당은 제2의 자유당이 된다는 것을, 해가 내일 동쪽에서 뜬다는 것보다 더 명백하게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여권은 김대중의 경고에도 기어이 3선 개헌안을 국회 제3별관에서 날치기 처리했다. 3선 개헌안은 국민투표에 부쳐져 쉽사리 통과됐다. 박 대통령 3선의 길이 열렸다. 신민당의 잠재적 후보는 유진오 총재였다. 그런데 유진오 총재가 그만 쓰러졌다.
1970년 1월 초 신민당 임시전당대회가 열리고 유진산씨가 총재로 선출됐다. 당시 유진산씨는 '사쿠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야당성을 의심받고 있었다. 그때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은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세대교체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김대중도, 이철승도 그 ‘40대 기수론’에 동조했다.
그러자 대권 도전에 뜻이 있었던 유진산 총재는 ‘40대 기수론’을 잠재우고자 이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의 정치적 미성년자들이다.”
하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그러자 유진산 총재는 세 명 가운데 자기가 한 명을 지명할 수 있는 지명권을 달라고 했다. 그때 김영삼씨가 포함된 진산계가 주류였고, 김대중, 정일형, 이재형계는 비주류였다. 유진산은 그 지명권을 얻게 되자 예상대로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다.
그래도 김대중은 포기치 않고 1970년 1월 24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설 것을 공식 발표했다. 그런 뒤 전국의 대의원을 찾아 나섰다. 그 무렵 야당 대의원들은 산동네에 많이 살고 있었다. 부인 이희호는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며 대의원집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 하의도 DJ 생가 ⓒ 박도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다
1970년 9월 29일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이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 개표 결과가 발표됐다.
“재적 885명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
아무도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그러자 2차 투표에 들어갔다. 무효표 82표는 이철승 후보의 표였다. 그때 이철승 계의 한 인사가 김대중에게 ‘다음 총재 선출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했다. 그러면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을 지지하겠다고 언약했다. 김대중은 명함 뒤에 각서를 써줬다. 곧 2차 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재적 884명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무효 16표.”
40대 대통령 후보 탄생은 한국정치사의 새바람이었다.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당선이 되자 가장 놀란 것은 박정희였다. 그런 탓인지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 선거 전에 경질되었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입후보한 김대중은 정책대결로 승부수를 던졌다. 종래 야당 투쟁 방식이었던 여당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때 김 후보가 제시한 정책은 향토예비군의 폐지, 대중경제 노선 추진, 미 ․ 중 ․ 소 ․ 일 4대국의 한반도 전쟁 억제 보장(이른바, 4대국 안전 보장론). 남북한 화해와 교류 및 평화통일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과 교역 추진, 초․중등학교의 육성회비 징수 폐지, 시차제 실시, 학벌주의 타파, 이중 곡가제 실시 등을 제시했다.
이 공약들은 유권자의 폭발적 관심을 보였다. 그 가운데 향토예비군 폐지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정부와 여당은 매스컴을 총동원하여 김대중을 안보 의식이 결핍된, 무책임한 정치인으로 몰아붙였다.
김대중의 4대국 안전 보장론, 남북 교류와 평화 통일론 공약은 유권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김대중의 공약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크게 퍼져나갔다. 이에 공화당 박정희 후보는 연일 김대중의 발언은 용공이라고 규탄했다.
“김대중이가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추고, 김일성이가 북을 치면 김대중이가 장단을 맞춘다.”
▲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김대중 후보 부부가 청중에게 답례하다 ⓒ 자료사진
영구 집권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오자 각 지방마다 공공사업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날마다 기공식을 가졌다. 신문은 철저하게 통제를 받았으며, 야당으로 선거 자금이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전 방위 감시망을 쳤다. 그런 가운데 조직 참모 엄창록이 저들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갔다. 그는 선거 귀재로 그의 변절은 김대중 캠프에서는 크나큰 손실이었다.
선거기간 중 김대중은 이른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계속 연설을 하며 전국을 누볐다. 전국 어디를 가도 청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통령 선거일을 일주일 앞둔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장에는 100만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김대중은 구름같이 몰려든 청중을 향해 생애 최고의 열정을 불태우며 사자후를 토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서울 시민 여러분! …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공화당은 지난 개헌 때 이미 박정희씨를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대통령을 시키려고 했으나, 그 당시는 아직 공화당 내부나 야당이나 국민이나 거기까지는 할 수 없어서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공화당이 그런 계획을 했다는 사실과 이번에 박정희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 집권 총통시대가 온다는 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1971년 4월 27일 마침내 투표일이었다. 김대중은 전국을 누비면서 최선을 다했다. 4월 29일 정오가 지나서야 개표가 완료됐다.
“박정희 6백 34만 2828표, 김대중 5백 39만 5900표.”
선거 후 한 신문의 칼럼이다.
“여하간 김대중 후보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잘 싸웠다. 그는 정치가로서 하늘이 준 그 도량과 그 식견과, 그 수완과, 그 웅변과, 그 정직한 자세를 마음껏 발휘했다.
그는 지금 혜성처럼 광망(光芒, 비치는 빛살)을 우리 민족에게 비쳐주고 있으며, 혼탁에 바진 이 나라 정계에 큰 정신제가 될 것을 부탁해 마지않는다. 하늘은 그에게 더욱 큰 대임과 대망을 안겨 주기 위해 이러한 시련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
- 동아일보 1971년 5월 1일자 3면 '횡설수설'에서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