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하마을의 노무현 생가 | |
ⓒ 박도 |
글쓰기 특강 중 벌어진 일
2015년 5월, 나는 경남 김해 가야대학교로부터 글쓰기 특강을 요청받아 그곳에 갔다. 나는 이따금 지방에서 특강을 할 때 지역 학생들의 흥미를 돋우고자 가능한 그 지방 인물이나 인연을 꺼낸다. 그 고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고장이라는 걸 미리 알곤 특강 주제인 '말과 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고자 그분의 예화를 들었다.
변방 김해 봉하마을 촌놈이, 부산고등학교나 경남고등학교 출신도 아닌 부산상고 출신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된 것은 말을 잘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서 상대 측에서 장인의 좌익 활동을 문제 삼을 때, 이렇게 맞받아 쳤습니다.
"(전략)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겁니까?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말로 그분은 한센병균보다 더 무서운 연좌제의 악령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 대통령 후보도 됐고, 대통령까지 됐습니다.
▲ 노무현 2002년 경선 영상 "제가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 | |
ⓒ 오마이TV |
그 말 때문인지 학생들의 눈빛이 금방 초롱초롱해지고 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날 강의가 끝나자 박수는 물론이요, 즉석에서 내 책을 구입한 학생들이 안 표지를 펼치고 사인을 부탁하고 기념사진 촬영까지도 이어졌다.
그때 대학 측에서는 기왕에 먼 길 왔으니 하루를 그곳에서 쉬고 그 다음날 한 차례 더 특강을 요청했다. 평생 중·고교 평교사로 지내다 퇴직한 교사가 면허증도 없이 대학 강단에 서는 일은 싫지 않은 일이라 그 요청을 수락했다.
나는 대학 측에서 마련해 준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편히 지냈다. 다음날은 가까운 노무현 생가 마을을 방문하기로 했다.
봉하마을에 가다
의병사 공부로 알게 된 의병연구의 대가 이태룡 박사가 마침 그 고장사람이었다. 그분의 안내로 이튿날 오후 봉하마을로 갔다. 그날 봉하마을로 가는 길목은 노무현 서거 6주기 추모행사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도로에는 노란 바람개비들이 빙빙 돌면서 나그네를 환영했다.
이태룡 박사는 당신의 저서와 국화송이를, 나는 국화송이를 제단에 바치며 깊이 고개 숙였다. 이 모든 것을 봉하마을 뒷산의 부엉이바위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 노무현 생가 뒤편의 부엉이바위 | |
ⓒ 박도 |
그는 왜 고향마을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을까? 나는 그 답을 염동연 친구에게 물었다.
"그분은 결벽증이 심한 분이었다네. 그 결벽주의 때문에 대통령까지 올라갔던 거지. 결벽주의는 청렴결백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때는 쉬이 견디지 못하는 단점도 있다네. 게다가 자신에게 겨누던 칼날이 안방으로 옮겨지자 당신이 희생해서 가족을 살리고자 문득 부엉이바위가 떠올랐을지도..."
가슴 먹먹해 떠듬거리는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일면 수긍이 갔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의 뜨거운 사랑에, 그런 애정을 미처 가져보지 못했던 나로서 그가 심히 존경스러웠다. 그는 아내를,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순정파, 의리의 사나이였다.
"경남 안의(함양) 출신 노응규 의병장이 노무현 대통령 종증조부입니다."
이 박사는 내가 전혀 몰랐던 노 대통령 가계를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의병장의 후예라서 남다른 강단이 있었나 봅니다."
"왕대 밭에 왕대 나지요."
돌아오는 길에 우리 두 사람은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 노무현 권양숙 결혼사진 | |
ⓒ 자료사진 |
노무현 부산상고에 진학하다
노무현은 1946년생으로 개띠다. 나는 그보다 1년 앞선 1945년생 닭띠다. 그래서 친밀감도, 때로는 부러움도, 그의 정의에 대한 용기를 보고 자굴심도, 자괴심도 가졌다. 노무현은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2녀 3남 중 막내로 9월 1일(음 8월 6일)에 태어났다.
그는 진영읍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영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비 때문에 애를 먹었다. 1960년 2월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앞두고 학교에서 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짓기 행사를 열었다.
소년 노무현은 이것은 부당한 일이니 백지를 내자고 학급 친구들을 선동했다. 그의 선동으로 친구들은 모두 백지를 냈다. 그는 괘씸죄로 교무실에서 온종일 벌을 섰다. 그에게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불같은 정의감이 흐르고 있었다. 또래인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 고교 진학을 포기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5급 공무원(현 9급)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큰형은 그 사실을 알고 부산상고에 진학케 했다. 그의 평생 최종학력에는 '부산상고'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노무현은 부산상고 졸업을 앞두고 농협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학교에서 알선해 준 한 어망회사에 취업했다. 급여가 형편이 없어 곧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됐다.
1968년 3월에 육군에 입대했다. 육군 상병으로 전역한 뒤 하늘의 별따기처럼 무모한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같은 동네에 살던 권양숙과 사귀었다. 권양숙의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협력한 혐의로 전쟁이 끝난 뒤 구속과 재수감을 거듭 하다가 끝내 옥사했다.
서로 사랑은 했지만 혼인은 순탄치 않았다. 노무현은 별 가능성이 없는 고시공부를 하는, 남의 집 귀한 딸 밥 굶기기에 딱 좋은 백수였다. 또한 신랑 쪽 어머니는 신부 쪽 아버지의 전력 때문에 썩 내키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물불 가리지 않고 서로 좋아했다. 그리하여 1973년 1월, 결혼식을 올렸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젊었을 적 모습. 영화 "노무현입니다" 중 한 장면. | |
ⓒ 영화사 풀 |
노무현, 사법고시에 합격하다
1975년, 노무현은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고졸 합격자는 노무현 단 한 사람뿐이었다. 노무현이 사법고시에 합격통보를 받자 그의 아내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범벅이 되도록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난 만큼이나 큰 경사였다. 마을에서는 돼지를 잡고 풍물을 치면서 일주일이 넘도록 동네잔치를 벌였다. 그것만으로도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후일 대통령이 됐을 때도 그때의 기쁨만 못했다.
그는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노무현, 그는 모범적인 법관도 우수한 판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에 대해서는 관대한 판사였다. 닭서리를 하다 잡혀온 젊은이나 소액의 '촌지'를 받았다가 기소된 하급 공무원에게는 무죄나 집행유예를 주려고 애썼다. 사연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1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판사직에서 물러났다.
1978년 5월에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 돈 걱정하지 않고 살게 됐으며, 알아보고 허리를 숙이는 사람도 많았다. 살맛 났다. 개천에서 용이 된 인물들이 대부분 그렇듯 초기의 노무현 변호사도 그랬다. 출세해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슬며시 녹고 있었다.
1981년 9월, 전두환 정권이 이른바 '부림(釜林)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그 사건에 손댄 것이 노무현의 삶을 인권변호사 '노변'으로 바꾼 계기가 됐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외 여러 권의 문헌과 염동연 전 의원의 증언, 그리고 당시의 신문보도 등을 종합 참고하여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