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5 공동 선언문 작성 기념 촬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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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남북정상회담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취임하자 북은 남과 정상회담을 원했다. 그런 징후가 여러 경로를 통해 DJ에게 보고됐다. 2000년 2월 어느 날 임동원 국정원장의 보고다.
"북측이 송호경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 부위원장을 대표로 정해 놓고, 싱가포르에서 접촉을 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DJ는 박지원 문광부장관을 특사로 지명해 싱가포르로 보냈다. 마침내 박 장관이 박씨를 물고 왔다. 이른바 '4․8 합의문'이다.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마침내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13일 서울을 출발하여 평양에 도착,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리하여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 남북 정상의 최초 만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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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공동선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 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 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 · 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 문화 · 체육 · 보건 ·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 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김대중 대통령 이희호 영부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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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먹던 힘까지
남북여성좌담회 등 북에서 강행군을 마치고 5시쯤 숙소로 돌아오니 대통령은 아직 정상회담 중이라고 했다. 2시간째 계속하고 있었다. 잠시 휴식 차 온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6시 전에 다시 회담장으로 갈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무거운 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고독하고 힘겨워 보였다. 한동안 배웅하면서 서 있자니 눈가가 젖어왔다. 누구에게 들킬세라 나는 얼른 눈가를 훔쳤다. 막중한 책임을 진 사람은 결정적 순간에 무섭게 외롭다. 그날의 그가 결혼생활 중 만난 가장 고독한 모습이었다.자정이 넘어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대통령은 곧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고 다음 날 일찍 찾아온 수행원들과 나눈 얘기다.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 내 평생 가장 길고 무겁고 보람을 느낀 날이다. 회담 3시간 50분 동안 3시간 30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절망적으로 생각해 두어 번 포기하고 싶은 심정도 들었는데 이 길이 어떤 길인가.
7000만 겨레의 염원을 생각하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설득했다. 김 위원장의 유연한 사고와 해박한 지식이 도움이 되었다. 합리적이어서 고집하다가도 납득이 되면 생각을 바꿨다." - 이희호 지음 <동행> 340~343쪽 축약
역대 대통령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중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 화해에 주춧돌을 놓았다. 이는 그분의 큰 업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에 금자탑을 쌓았다.
▲ 어느 봄날 청와대에서 김 대중 대통령 내외가 봄볕을 즐기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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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김대중 회고록>, 이희호 지음 <동행>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및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