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이희호 부부 | |
ⓒ 김정호 제공 |
DJ, 13대 총선, 기사회생
13대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자 모든 비난이 야권에 쏟아졌는데 그 비난은 김영삼보다 김대중에게 집중됐다. 다시 야권 통합론이 고개를 들었다. YS의 통일민주당에서는 DJ의 평민당을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DJ는 오히려 박영숙, 이길재, 문동환, 임채정, 정동년, 이해찬 등 재야인사 91명을 당에 영입해 진영을 보강했다.
1988년 4월 26일 17년 만에 소선거구제가 부활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은 125석, 평민당은 70석, 민주당은 59석, 공화당은 35석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출현했다. 이로써 DJ는 기사회생하게 됐다. 하지만 1990년에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3당을 합당시켜 거대 여당인 '민자당'을 출범시켰다.
DJ는 3당 합당에 반대한 민주당의 잔류세력과 연합해 통합민주당을 만들었다. 3당 합당은 밀실 야합이었다. 그들은 보수 대연합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반민주 야합이고 반호남의 연합이었다.
이런 형국을 돌파하고자 DJ는 지방자치제 관철에 주력했다. 그리하여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단식 13일 만에 민자당으로부터 1991년 상반기에 지방의회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30년 만에 실시된 1991년 3월과 6월의 지방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이 압승했다. 하지만 DJ도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그 선거를 통해 많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92년 3월 24일에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에서 YS의 민자당은 219석에서 149석으로 참패했다. DJ의 민주당은 63석에서 97석으로 약진하고, 신생 정주영의 국민당은 31석을 차지했다.
▲ 제14대 대통령 선거 다음 날 신문 1면 | |
ⓒ 자료신문 |
DJ, 영국으로 떠나다
1992년 5월 25일, 서울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DJ는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세 번째 대선 도전이었다. 그해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4대 대통령선거에는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국민당 정주영, 이종찬(중도사퇴), 박찬종, 이병호, 김옥선, 백기완 씨 등이 출마했다.
선거결과 민자당 김영삼 후보 997만표(42.0%), 민주당 김대중 후보 804만표(33.8%), 국민당 정주영 후보 388만표(16.3%), 박찬종 151만표(6.3%)로 민자당 김영삼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그날 밤 11시쯤 당사에서 돌아온 남편은 쓸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번에도 하느님은 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이제 정계를 떠나려고 하오.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써주오."
그의 비장한 결정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그가 구술하고 나는 받아 적었다. - 이희호 지음 <동행> 302쪽
▲ 하의도 큰 바위 앞에선 김대중 부부 | |
ⓒ 박도 |
정계은퇴 선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저는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저는 김영삼 총재가 앞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여 국가의 민주 발전과 조국의 통일에 큰 기여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
이제 저는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 <김대중 회고록 1> 606쪽
1993년 1월 26일, DJ 부부는 홀연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 하의도 김대중 생가 보도블럭의 어록 | |
ⓒ 박도 |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김대중 회고록>, 이희호 지음 <동행>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및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