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봄 시절 YS와 DJ.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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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10.26 사태 후 1979년 12월 12일,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보낸 헌병들이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했다. 최규하 대통령 재가 없이 저지른 불법이었다. 12.12 사태는 예사롭지 않았다. 전두환과 그 일파들이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했음은 중대한 사태였다.
1980년 새해를 맞았다. 정국은 불안했다. 매스컴에서는 '서울의 봄'이라 하여 요란을 떨었다. 하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시구처럼 꽃 피고 새우는 따뜻한 봄은 아니었다. 정치권은 마냥 미로를 헤매고 있었다. 당시 국민들의 요구는 대통령 직선제였다. 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의 행보는 갈수록 묘연했다.
그해 2월 말 김대중은 복권이 됐다. 곧 김영삼-김대중 단독회담을 가졌다.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거듭 신민당 입당을 재촉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입당치 않고 관망적 자세를 취했다.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은 다시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추가로 맡았다. 이로써 전 장군은 나라의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5월 14일 서울, 대구, 광주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대대적인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유신 잔당 타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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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 장면(198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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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사형!"
5월 17일 전군 지휘관 회의를 거쳐 국방부장관이 제출한 비상계엄 확대 안은 오후 9시 50분에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전두환의 5.17 쿠데타였다. 그날 오후 10시가 넘어 동교동 김대중 집 초인종이 울렸다. 40여 명의 군인들이 덮쳤다. 그런 뒤 김대중을 연행해 갔다. 김대중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힌 지 60일 만인 1980년 7월 15일 성남시의 육군교도소로 이송됐다.
1980년 8월 14일 오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첫 번째 계엄 군법회의가 열렸다. 이 사건에 연루된 24명은 비로소 한자리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9월 11일, '내란 음모' 혐의로 수감된 24명에 대해서 검찰 측의 구형이 있었다. 김대중에게는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죄로 사형이 구형됐다.
김대중은 최후 진술을 했다.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 간 나를 위해서든, 또는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9월 17일 선고 공판이 열렸다. 김대중은 재판장의 입 모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었고, 입술이 앞쪽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징역이었다. 마침내 재판관의 입이 찢어졌다.
"김대중 사형!"
그러나 세계여론이 김대중을 살렸다. 1981년1월 23일 김대중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해 1월 31일 청주교도소로 이감됐다.
▲ 수형생활 중 독서하는 DJ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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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즐거움
교도소생활의 첫째 즐거움은 단연 '독서'였다. 김대중은 청주교도소에서 보낸 2년은 온통 독서에 빠져 지냈다. 철학, 신학,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다방면의 책을 읽었다. 아내 이희호는 여러 책을 구해서 넣어주었다. 김대중은 책을 읽으면서 '만약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진리를 깨우쳐 없었을 것이다'며 무릎을 쳤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었다. 지금은 자본, 노동, 토지 등의 경제 혁심 요소인데 미래는 정보와 지식, 그리고 창의력이 핵심이라는 내용은 후일 김대중이 '정보화 대국'의 국정을 펴는 출발점이었다.
그 둘째 즐거움은 '가족 면회'였다. 매달 한 번씩, 한 번에 10분간으로 제한됐다. 손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가족을 만난다는 것은 다시없는 즐거움이었다. 가족과 나눈 정신적 교감은 살아있게 만드는 또 다른 힘이었다.
그 세 번째는 '편지를 받는 즐거움'이었다. 아내는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썼다. 무려 649통이었다. 아들과 형제, 조카들도 600통 가량을 보냈다.
"존경하는 당신에게
외부와 완전히 단절돼 있는 곳에 계신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 깊은 동면이 있기에 봄이 새로운 개구리처럼, 이 추운 겨울은 소망과 생명을 잉태하는 계절인가 합니다. (1981. 2. 21.)
당신의 오늘 모든 것을 연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립니다. 당신은 내가 눈물 없는 사람으로 알고 계시지만 실은 나는 너무 눈물이 많은 사람이랍니다. 나는 남 보는 데서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서 참고 눈물을 삼켜버리고 보이지를 않습니다, 더구나 당신이 아파하실까봐 당신에게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한 것인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나 봅니다. (1981. 2. 26.)"
-이희호 <옥중서신> 153,155쪽
네 번째 즐거움은 '화단 돌보기'였다. 매일 점심 후에는 한 시간 정도의 운동시간이 주어졌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김대중은 꽃을 가꾸며 그들과 대화했다. 잘 자라지 않는 꽃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난 너에게 실망했다. 나는 너를 정성껏 돌봤는데, 너는 내 정성에 보답지 않았어.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단다."
그 뒤 그 꽃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 서로 등을 돌린 YS와 DJ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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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대선에서 낙선하다
1982년 12월 16일, 김대중은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고, 일주일 뒤인 12월 23일 밤 워싱턴공황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제2차 망명생활이 시작됐다. 2년 남짓 망명생활을 마침 뒤 1985년 2월 8일 김대중은 귀국했다.
그해 2월 12일 총선이 있었다. 투표함을 열자 국민들은 열광했다. 선거 혁명으로 신민당의 승리였다.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을 얻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은 35석에 그쳤다.
야권과 재야, 그리고 학생들은 그 여세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을 몰아 마침내 1987년 6월항쟁끝에 6.29 선언을 받아내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했다. 그해 7월 9일 사면 복권된 김대중은 야권의 지도자 김영삼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노태우 민정, 김영삼 민주, 김대중 평민, 김종필 공화 등의 1노 3김의 각축을 벌였다.
이 선거전은 여권의 치졸한 작전대로 극심한 지역갈등이 벌어졌다. 선거 전날 대한항공 폭파 사건의 범인이라는 김현희의 귀국은 선거판을 요동치게 했다. 선거 결과 노태우 후보 828만 표, 김영삼은 633만 표, 김대중은 611만 표의 지지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모든 비난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야권에게 쏟아졌고, 여론의 화살은 김대중에게 집중됐다.
▲ 하의도 DJ 생가 | |
ⓒ 박도 |
"회한에 젖은 그는 '국민들의 염원을 위해 내가 양보했어야 했다'라며 후회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생각이었다. 나 역시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이희호 지음 <동행> 286쪽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김대중 회고록>, 이희호 지음 <동행>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및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