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정의 목소리는 점점 또랑또랑해졌다 “민주주의 만세!”
페이지 정보
본문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9회 3·1민주구국선언 (상)
제3부 유신의 암흑-9회 3·1민주구국선언 (상)
1976년 이른바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1명이 구속되고 7명이 불구속되자 그 부인들은 ‘양심범가족협의회’를 결성해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나섰다. 사진은 76년 5월4일 첫 공판이 비공개로 열리는 바람에 참관도 하지 못한 가족들이 불구속 기소자로 법정에 섰던 이우정 교수한테서 설명을 들으려 기독교회관 식당에 모였을 때 모습이다. 왼쪽부터 고귀손(윤반웅 〃), 박순리(서남동 부인), 이우정, 이희호(김대중 부인), 박영숙(안병무 〃), 공덕귀(윤보선 〃), 박용길(문익환 〃), 김석중(이문영 〃). 뒷줄 맨 왼쪽 이종옥(이해동 〃)씨가 소장해온 사진이다.
김대중은 국외로 나갈 수도 없고 걸핏하면 가택연금을 당해 활동에 제약을 받자 집에서 책을 읽고 신앙과 역사에 관한 공부를 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76년 1월2일부터 사흘 동안 대전성당에서 열린 ‘꾸르실료 교육’에 참석하기도 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평신도에게 행하는 신앙 쇄신 교육 과정이었다. 김대중은 이 수련을 받고 꾸르실료 회원이 됐다. “우리는 그때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안이숙씨의 신앙 간증 책 <죽으면 죽으리라>를 내가 먼저 읽고 남편에게도 권해 함께 읽었어요. 안이숙씨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반대 활동을 했던 분인데, 일본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가 ‘회개하지 않으면 유황비가 쏟아질 것’이라고 경고하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붙잡혀 옥살이를 한 분이었어요. 그분의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지요.”
긴급조치 9호로 온나라가 꽁꽁 남편은 김수환 추기경 만나 고해성사
“가만히 있어서는 안될 것 같다”고 그렇게 쓰여진 초안 큰오빠 집으로
이태영-윤보선-문익환한테 릴레이 선언문 완성되자 “한복 다 됐다” 답신
1976년 명동성당 3·1절 기념미사 때 발표한 ‘민주구국선언문’. 사진은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필사해 족자로 만들어 소장했던 것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긴급조치 9호로 온 나라가 얼어붙어 있었다. 1976년 2월 김대중은 명동성당을 찾아가 추기경 김수환을 만나 고해성사를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추기경님을 찾아뵈었어요. 이렇게 유신독재에 짓눌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얘기했어요. 누군가 일어서야 할 상황이라고, 자기는 감옥에 갈 각오가 돼 있다고 유언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드렸어요.” 말없이 듣던 추기경은 김대중의 손을 잡았다. 2월 하순 김대중은 정일형·윤보선과 협의해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 무렵 이심전심으로 문익환·안병무를 비롯한 재야인사들도 선언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익환은 당시 대한성서공회 신·구약 공동성서 번역위원회 구약번역실장을 맡고 있었으나,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데 충격을 받고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다.
삼일절을 앞두고 김대중은 ‘3·1 민주구국선언’ 초안을 작성했다. 동교동 집 주위 감시망을 피해 필동의 이희호 큰오빠 이강호 집에 초안을 전달하면, 이태영이 받아 남편 정일형과 검토한 뒤 윤보선의 안국동 집에 전달했다. 김대중이 작성한 초안은 민주 회복 염원을 담은 장중한 글이었지만 윤보선은 좀더 강경한 내용이 담기기를 바랐다. 윤보선과 연락이 닿은 문익환은 김대중의 원고를 바탕으로 삼아 격한 문구가 들어간 초안을 다시 작성했다. “그땐 필동 큰오빠 집이 연락 거점이었어요. 암호를 ‘한복’으로 했지요. 문익환 목사의 선언 초안을 이태영 박사가 받아서 필동에 전달하면 큰올케가 ‘한복 다 됐다’고 우리 집에 전화를 해주었어요. 그러면 원고를 받아다가 다시 우리 집에서 수정·가필을 해서 다시 그쪽으로 보냈지요.”
그렇게 두세 번 오고 가는 과정을 거쳐 김대중의 초안과 문익환의 초안이 절충된 선언문이 완성됐다. 최종 서명자는 함석헌·윤보선·정일형·김대중·이우정·문동환·서남동·이문영·윤반웅·안병무 10명이었다. 선언문 초안을 쓴 문익환은 공동성서 번역 사업이 끝나지 않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명단에서 빠졌고, 대신 모든 것을 동생 문동환이 한 것으로 하기로 했다. 완성된 선언문은 문익환의 큰아들 문호근이 타자를 치고 한빛교회 담임목사 이해동이 등사를 했다.
그날 저녁 명동성당은 긴장감 팽팽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
선언문 낭독은 촛불시위로 이어져 다음날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서명자에 남편이 포함된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며 “모두 잡아들여라”
선언문 낭독은 촛불시위로 이어져 다음날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서명자에 남편이 포함된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며 “모두 잡아들여라”
1976년 3월1일 저녁 여섯시 명동성당에서 신·구교 합동 삼일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신·구교 신도 700여명이 모인 대규모 미사였다. “우리는 감시를 받고 도청을 당하던 터라 거사가 그렇게 큰 규모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날 남편은 감기로 몸이 안 좋아 집에서 쉬고, 나와 김옥두 비서만 같이 명동성당으로 갔지요. 성당 안에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그래서 김옥두 비서에게 남편을 다시 모셔오라고 부탁했지요.” 미사는 신부 장덕필의 사회로 시작돼 신부 김승훈이 삼일절의 뜻을 되새기는 강론을 하고 한신대 교수 문동환이 설교를 했다. 마지막으로 서울여대에서 해직된 이우정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키가 작고 양처럼 온순한 이우정은 비장하고도 떨리는 목소리로 “이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라고 말한 뒤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는 1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한다.” 장내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엄숙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우정의 목소리가 점점 또랑또랑해졌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민주주의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로든 민주주의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선언은 민주주의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실천이자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의 나라들에서 실천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를 형성한 성원들의 뜻을 따라 최선의 제도를 창안하고 부단히 개선해 나가면서 성원 전체의 권익과 행복을 도모하는 자세와 신념을 말한다.” 선언은 구체적인 요구사항도 제시했다.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표명될 수 있도록 언론·집회·출판의 자유를 국민에게 돌리라고 요구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유신헌법으로 허울만 남은 의회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셋째로 우리는 사법권의 독립을 촉구한다.” 이우정은 “민주주의 만세!”라는 마지막 말로 선언문 낭독을 끝냈다.
명동성당에 집결한 사람들은 3·1 민주구국선언을 마친 뒤 성당 경내에서 유신철폐를 염원하는 촛불시위를 벌였다. “함석헌 선생님이 원효로에서 사셨는데, 차가 없으셨어요. 그래서 남편과 나는 촛불시위가 끝난 뒤 함석헌 선생님을 댁에 모셔다드리고 집으로 왔지요.” 그날 밤 선언문을 낭독한 이우정이 맨 먼저 명동성당 관할서인 중부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때 상황을 이우정은 이렇게 회고했다.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으나 별로 복잡할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고 해서 아침에 석방을 결정하고 절차를 밟고 있는데 갑자기 석방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건은 ‘정부전복음모’로 부풀려져 차례차례 서명자들이 붙들려가고
마침내 남편과 함께 남산으로 연행 “민주회복에 동참할 수 있어 영광”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와
마침내 남편과 함께 남산으로 연행 “민주회복에 동참할 수 있어 영광”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와
지금까지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뒤 촛불시위 장면으로 알려졌던 이 사진은 75년 2월6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인권회복 기도회’ 때로 확인됐다. 김대중(가운데)·이희호(뒤쪽)와 늘 함께했던 정일형(오른쪽)은 3·1 사건으로 불구속돼 국회의원직을 빼앗겨야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애초에 중앙정보부는 이날의 행사를 종교계나 학계에서 삼일절이 되면 으레 하는 연례행사로 보고 적당히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국무회의에서 박정희가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한 사람 중에 김대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화를 내며 모두 잡아들이라고 하는 바람에 일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이우정은 중앙정보부 수사국으로 넘겨져 열흘 동안 조사를 받았다. 수사관들은 김대중·윤보선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도표를 만들어 보이며 그 사실을 인정하라고 윽박질렀다. 이우정은 “가만히 눈치를 보니 그 정치인들 중에서도 김대중씨를 주모자로 만드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3·1 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하거나 행사를 꾸린 사람들이 3월2일 낮부터 잡혀 들어갔고 사건은 정부 전복 음모로 부풀려졌다. 3월5일 문공부 장관 김성진은 이 사건을 ‘헌법 질서를 파괴하려는 비합법 활동’이라고 발표했고, 서울지검은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못박았다. 중앙정보부는 사건이 나고 일주일이 지난 뒤인 3월8일에 김대중과 이희호를 연행했다. “우리는 3월7일이 되어도 별일이 없어 이번엔 무사히 넘어가나 보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다음날 새벽에 김옥두 비서가 잡혀갔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날 오후 두시쯤이었는데 기관원들이 우리 집으로 왔어요. 나도 함께 가야 한다고 해서 남편의 뒤를 따라 나갔지요.”
도착해보니 남산 중앙정보부였다. “남편은 위층으로, 나는 아래층 왼쪽으로 끌려갔어요. 내가 들어간 방에는 수사관이 여럿 있었는데. 중앙에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더라고요.” 이희호는 수사관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태연하고도 결연하게 말했다. “민주 회복을 위해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쳐 가는데 나도 동참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희호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신문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미리 준비한 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어요.” 유신 초기에 비서들이 잡혀가 고문받을 때 가슴 졸이며 두려움에 떨기만 하던 이희호가 아니었다.
“수사관이 나에게 이력서를 한 장 쓰라고 했어요. 이력서를 쓰고 나자 조사가 시작됐는데 너무도 세밀한 부분까지 이것저것 다 물어왔어요. 대답을 회피하면 성화를 부리고요. 나중에 저녁식사가 들어왔는데 나는 먹지 않겠다고 했어요. 거기 있는 동안 내내 음식을 거절했지요. 밤늦도록 신문을 받고 책상에 머리를 댄 채 밤을 보냈어요. 불빛이 너무나 밝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우리나라 전력은 중앙정보부에서 다 쓰는 것 같았어요.”
이희호는 “고문당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과 비교하면 내가 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괴로운 밤을 기도로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 수사관이 또 식사를 권했지만 이희호는 다시 거절했다. “하느님께 금식 기도를 약속했으니 더 귀찮게 하지 말고 보리차만 달라고 했지요.” 똑같은 내용으로 다시 신문이 이어졌다. “사흘째 아침에 수사관이 진술서를 써야 한다면서 전날 내가 쓴 글을 보이며 똑같이 쓰라고 해요. 나는 그대로 쓰지 않고 내 나름대로 의견을 적었어요.”
1976년 ‘3·1 명동성당 사건’으로 김승훈·문정현·신현봉·함세웅 4명의 신부를 포함한 민주 인사들이 대거 기소되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3월 중순 명동 성모병원 마당에서 ‘구속자 석방과 헌정질서 회복을 촉구하는 시국기도회’를 열어 유신독재의 폭압정치에 맞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는 3월10일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남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더라고요. 나는 이태영 박사가 석방됐다는 말을 듣고 댁으로 급히 갔어요. 이태영 선생님이 남편이 석방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좀 안심이 되었지요. 그런데 오후 6시 뉴스에서 구속자 명단이 나오는데 남편 이름이 거기에 있었어요. 벌써 구속돼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고 하는 거예요.”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문익환·문동환·윤반웅·서남동·이해동·문정현·신현봉·함세웅·이문영·안병무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의 주모자로 엮어 구속했다. 모두 11명이었다. 또 윤보선·함석헌·정일형·이태영·이우정·김승훈·장덕필을 불구속 기소했다. 나이가 많거나 여성이거나 가담 정도가 낮다는 것이 이유였다.
국내 언론은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의 진실을 한 줄도 알리지 못했고 3월10일에야 정부 발표만 전했다. 반면에 국외 언론들은 민주진영 지도자들이 대규모로 구속되자 이 사실을 크게 알렸다. 당시 국내 신문들은 시국사건을 붕어빵 찍어내듯 똑같이 보도했다.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니 크기와 제목까지 똑같았다. <조선일보>는 한술 더 떠 3월14일치 ‘한국 국민의 생각-1976년 3·1절에 있은 정부전복 선동 사건에 부쳐’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3·1 민주구국선언 주도자들을 비난했다. “젖을 물려 아기에게 잠을 재우려 할 때 베토벤의 심포니도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는 소음일 수 있는데, 하물며 안보와 발전에 질서와 안정이 필요한 마당에 느닷없는 그와 같은 정치적인 사건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이 땅에 정치적 사건이 일어날 때면 으레 민주주의의 기치를 내어 흔들어 야단법석으로 보도하기 마련인 행복스런 외국 기자들”을 들먹이며 훈계하기까지 했다. 자유언론실천 선언을 한 기자들을 내쫓은 뒤 이 땅의 언론은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양심마저 말라버린 상태였다.
김대중이 구속되자 이희호는 남편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뛰어들었다. “처음 옥바라지를 하게 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요. 남편이 구속된 다음날이 목요일이었는데, 종로 기독교회관 2층 인권위원회 방에서 열린 목요기도회에 참석했더니 다들 격려를 해주고 위로를 해주었어요.” 3·1 사건으로 구속된 11명 중에서 신부 세 사람을 제외한 여덟 사람의 부인들과 불구속된 이우정, 또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까지 열 사람이 한 팀을 이루었다.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은 ‘양심범가족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옥중에 있는 남편들의 석방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이희호와 구속자 부인들이 참여한 목요기도회는 얼마 뒤 미아리 한빛교회에서 계속됐고, 공판이 시작된 뒤로는 매주 금요일 저녁 기독교회관에서 따로 금요기도회를 열었다.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다. 목사 이해동의 부인 이종옥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광적인 횡포가 우리 사이를 뗄 수 없는 가까운 사이로 맺어주었다. 남편들을 감옥에 둔 아픔을 안고 우리들은 어느 친척 못지않게 깊은 정으로 결속되어 고락을 함께했다.”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