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걸음에 목소리는 우렁찬 여대생…이희호 별명은 ‘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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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이희호는 일제로 인해 이화여전 2년 만에 강제로 마쳐야 했던 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6년 9월 서울대 사범대 영어과에 입학한 이희호는 3학년 때 교육과로 전과했다. 사진은 1949년 교정에서 교육과 교수·동기들과 함께한 모습으로, 맨 뒷줄 왼쪽이 이희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평전] ⑤ 제1부 학업시대-4회 사범대 리더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 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해방의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진주했고, 미·소의 분할선은 머잖아 남북의 분단선으로 굳어질 참이었다.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이냐를 놓고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 갈등이 날이 갈수록 격심해졌다. 한반도 전체가 이념 충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었다. 자주독립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온 겨레의 꿈이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희호의 가족은 15년 넘게 살던 서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의사가 된 둘째오빠(이경호)와 함께 병원 일을 시작했다. 여동생 영호는 언니의 뒤를 이어 이화고녀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간 뒤 해방 직후 9월에 같은 은행 동료와 결혼했다.
이희호의 소망은 여전히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해방 이듬해 4월 이희호는 아침 일찍 인천 셋째오빠(이태호) 집을 나와 서울행 기차를 탔다. 일본인 올케가 친정으로 돌아가 있던 터라 이희호는 그 무렵 셋째오빠 집에 머물며 살림을 도와주고 있었다.
해방 전의 이화여전은 이화여자대학이 되어 있었다. 이희호는 문과 과장 방문을 두드렸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문과 과장을 맡고 있었다. “정지용 교수는 당시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어요.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잘생긴 분이었지요.” 이희호는 정지용에게 3학년으로 편입시켜 달라고 이야기했다. 이화여전을 2년 다니고 강제로 졸업을 당했으니 3학년부터 다시 다니게 해 달라는 것이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정지용의 답변은 이희호를 실망시켰다. 문과는 2학년으로 들어와야 하고 또 시험을 먼저 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2년을 허송하다 후배들과 같이 학교에 다닌 것도 억울했는데 또 시험을 쳐서 2학년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니 기운이 쭉 빠졌다. 방문을 닫고 나오는 이희호의 눈에서 눈물이 솟았다. ‘어디에 가서 하소연해야 하나?’
이희호는 북아현동 고갯길을 걸어서 넘어 서울대학교로 통합되기 전의 동숭동 문리대로 갔다. 철학과 교수 박종홍의 방문을 두드렸다. 박종홍은 이희호가 이화여전 학생일 때 문과 과장이었다. 이희호는 자기를 가르쳤던 스승에게 문리대 청강생으로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박종홍은 “우리 학교에 청강생 제도가 없다”며 공부해서 가을 입학시험을 보는 게 어떠냐고 옛 제자에게 얘기했다. 그 시절은 미군정 때여서 대학 학기가 미국처럼 9월에 시작했다. 머릿속에 먹구름이 끼는 것 같았다.
서울대 사범대 시절 이희호는 활달한 성격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여학생은 물론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사진은 1950년 4월 교복과 교모를 착용한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박종홍 교수 연구실 아래층에 최호진 교수 방이 있었다. 최호진은 조선경제사 연구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이희호 고모부의 사촌이어서 잘 아는 사이였다. “최호진 교수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여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일단 여자사범대학 부설 중등교원 양성소에 다니며 자격증을 따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요.” 최호진의 조언대로 이희호는 인천에서 통학하며 3개월 과정을 이수하고 중등교원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실제로 그 자격증을 써먹지는 못했지요.”
이 무렵 고종사촌 최정환이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이희호에게 같이 공부해서 서울대 문리대 입학시험을 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서울대는 하나로 통합돼 출범하기 직전이어서 단과대학별로 시험을 치렀다. 이 제안이 이희호의 삶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이희호는 고종사촌 집에 머물면서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문리대 국문과에 응시한 이희호는 결과가 어찌될지 몰라 사범대 영어과에도 지원했다.
“문리대 시험은 경제학·철학·역사·수학을 포함해 일곱 과목인가를 봤어요. 여학교 다닐 적에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는데, 시험지를 받아 보니 배운 적 없는 고등수학이 나왔어요. 백지로 내다시피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문리대와 사범대 양쪽 다 합격했더라고요.”
이희호는 문리대 국문과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동숭동 문리대 본부로 등록하러 갔다. “본부에 가보니 분위기가 아주 험악해요. 대학생들하고 기마경찰대가 대치하고 있는데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때가 바로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 반대운동이 불타오르기 시작하던 때였다.
국대안 파동은 1946년 8월23일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경성대학과 서울·수원 전문학교 9곳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로 재편하는 방안을 발표하자 거기에 관련된 교수·학생이 반발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좌익은 미군이 서울대 총장을 맡는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의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흉계”라고 주장했다. 좌익의 반대가 거세지자 이번에는 우익이 조직적으로 국대안에 찬성하고 나섰다. 결국 처음에는 대학 개편에 따른 이해관계자들의 반대운동이었던 것이 미군정에 대한 정치적 반대운동으로 번지고 나중에는 좌익과 우익 사이의 극심한 폭력적 갈등으로 비화했다. 국대안 파동은 1947년 여름까지 계속돼 수천명의 학생이 제적당했다가 복적됨으로써 가라앉았다.
이희호가 등록하러 간 날은 국대안 파동으로 충돌이 격렬해지던 때였다. 이날 본부에 발도 들이밀지 못한 이희호는 등록 기한 마지막날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경찰과 학생의 살벌한 대치는 풀릴 기미가 없었다. “그때 서울역에서 만난 친구가 사범대로 등록하러 간다기에 그 친구를 따라가 사범대 영어과에 등록했어요.” 우연과 운명이 겹친 행로였다.
서울대 2개과에 동시 합격한 뒤 친구 따라 사범대 영어과에 등록
담당교수 피천득 만류 뿌리치고 유학 가고 싶어 교육과로 옮겨
담당교수 피천득 만류 뿌리치고 유학 가고 싶어 교육과로 옮겨
“언니스런 인품과 활발한 성격 사범대 여대생의 지도자 역할”
거침없고 활기 넘치는 태도에 한두살 더 많은 남학생들도
모두 ‘누님’이라 부르며 따라
거침없고 활기 넘치는 태도에 한두살 더 많은 남학생들도
모두 ‘누님’이라 부르며 따라
1949년 학도호국단 창설되자 부대대장 맡아 학생들 지휘
“남학생들보다 목소리가 커서 구령 소리가 아주 잘 들렸대요”
“남학생들보다 목소리가 커서 구령 소리가 아주 잘 들렸대요”
사범대에 입학한 뒤 이희호는 문리대에 미련이 남아 중도에 전과를 시도했다. “사범대에 좌익이 많아 공부할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는 것도 이유였다. “여학생들이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수업 중에 들어와 교실 뒤에 서서 지켜보기도 했어요.” 이희호는 친척의 도움으로 당시 미 군정청 문교부장 고문으로 있던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원한경)를 찾아갔다. 언더우드는 사범대 학장의 허락을 받아오면 문리대로 옮겨주겠다고 말했다. 이희호는 다시 사범대 학장 장이욱을 찾아가 방문을 두드렸다. “학장을 만났는데, 좌우익 충돌로 사범대학이 얼마나 시끄럽던지 골치를 앓고 있는 거예요. 거기다 대고 ‘사범대 싫으니 문리대로 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어 그냥 나오고 말았지요.”
국대안 사건 이후로 서울대의 좌우익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사범대에 특히 좌익 학생과 교수가 많았지요. 여기에 맞서 우익 학생들도 결집해 연일 시위를 벌이고 그 와중에 부학장이 우익 학생들에게 테러를 당해 목숨을 잃기도 했어요.” 좌익이나 우익이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대학뿐만이 아니었다. 해방정국의 온 나라가 좌우익 갈등으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이희호는 3학년에 올라갈 때 사범대 안의 교육학과로 적을 옮겼다. 중등학교 교사가 되는 것보다는 공부를 계속해 유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영어과에 다닐 때 수필가로 유명한 피천득이 담당 교수로 있었다. 세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린 <인연>의 그 피천득이다. 뒷날 팔순을 넘긴 노년의 피천득은 사범대 학생 이희호를 기억하는 짧은 글을 남겼다.
“(이희호는) 서울대가 종합대학교로 된 초기에 사범대학 영어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때 그의 학업성적은 탁월하였고, 언니스러운 인품과 활발한 성격은 사범대학 전교 여학생들의 지도자적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영어과 2학년을 수료한 후 교육과로 전과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나는 간곡히 말렸습니다. 그는 가고야 말았습니다.”
이 시기에 가까이 지낸 사범대 후배로 시인 김남조가 있다. 대학시절 선배를 따랐던 김남조는 1970년대 이후 이희호가 유신정권의 핍박을 받을 때 마음을 나누는 벗이 됐다. 남편이 옥중에 있는 동안 이희호는 서울 효창동에 있는 김남조의 집을 찾아가 위로를 받았다. 그게 문제가 돼 김남조는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왜 이희호를 만나느냐’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희호는 후배가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훗날에야 알았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발걸음을 끊을까봐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1949년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는 전국의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일제히 학도호국단을 조직해 군사훈련과 반공교육을 의무화했다. 서울대 사범대 3학년에 다니던 이희호는 여학생 대표로 학도호국단 부대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사진은 1946년 종합대학으로 통합된 뒤 열린 서울대의 총체육대회에서 여학생들이 교복 차림으로 입장하는 모습. 사진 서울대 제공
대학생 이희호는 혼자 돌며 공부에만 몰두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피천득의 회고에서도 얼핏 드러나듯이 이희호는 사범대 여학생들의 리더 구실을 했다. 그 시절 이희호에게 따라붙었던 별명이 독일어 중성 관사 ‘다스’(das)였다. 행동만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행동이 남성적이었어요. 그래서들 ‘다스’라고 불렀지요.”
중성적인 씩씩함은 불리한 환경에 대처하려고 이희호 스스로 연출한 태도이기도 했다. 딸이라고 해서 표 나게 차별을 받아본 적이 없고 여자들만 있는 학교를 다니며 평등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처음 남녀공학에 입학했을 때 이희호가 받은 문화적 충격이 작지 않았다. 남존여비 의식이 남자들의 몸과 마음에 배어 있었다.
남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 자신이 가부장제 사고방식에 젖어들어 기를 펴지 못했다. 가정학과를 빼면 여학생 수가 많지 않았는데, 점심시간이면 여학생들끼리 빈 강의실에 모여 조용히 도시락을 먹었다. 여학생들은 부끄러워서 남학생들 사이에 끼지도 못했다. 이희호는 여학생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에 남녀 학생들이 같이 모이면, 남학생들은 맥주를 사다가 마셔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앞이라고 수줍어서 과자도 제대로 집어먹지 못하고 고개만 수그리고 있어요. 여자들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보라고 했어요. 또 모임이 있을 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도록 음료수를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지요.”
그 시절 이희호와 남학생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이 ‘누님’이다. 남학생들은 너나없이 이희호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거침없고 활기 넘치는 태도로 일마다 앞장서는 것이 누님다웠다. 당시 경동교회 전도사였던 강원용의 목격담이다.
“이희호씨는 성격이 소탈하고 인간관계가 아주 원만한 사람이어서 그와 만나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그를 좋아했다. 남학생들과도 아주 가깝게 사귀었는데 혹시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정도였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은 이희호씨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이희호씨보다 나이가 한두 살 위인 학생도 서슴지 않고 누님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물자 부족으로 책이 귀한 시절이었다. 책을 직접 손으로 베끼고 등사판으로 밀어 교재를 만들어 써야 했다. 글씨를 반듯하고 시원하게 쓰는 이희호는 2년 동안이나 등사실에 살다시피 하며 그 일을 했다. 보통은 남학생들이 하는 일이었다.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남자 뒤로 빠져선 안 된다는 것이 이희호의 생각이었다. 말을 앞세우지 않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페미니스트 이희호가 여성차별 현실 앞에서 택한 전략이었다.
학도호국단 활동은 그 시절 이희호의 태도와 성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대학 3학년 때인 1949년 3월 전국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일제히 학도호국단이 조직됐다. 이희호는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대대장을 맡았다. 여학생에게 할당된 몫이었다. 1949년 4월22일 서울운동장에서 대통령 이승만과 문교부 장관 안호상이 참석해 중앙학도호국단 결성식을 열었다. 결성식이 끝난 뒤에는 시가행진을 했다. 이희호는 키가 160㎝였는데, 그 시절 기준으로 보면 작은 키가 아니었다. 더구나 자세가 반듯하고 꼿꼿했다. 부대대장 이희호는 남학생 대대장이 없을 때면 조회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구령을 했다. “남자들보다 목소리가 커서 구령 소리가 아주 잘 들렸어요.” 서울지역 전 대학 학생들이 모여 집회를 하고 행진을 할 때도 이희호는 사범대 학생들을 지휘했다.
당시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권이 반공과 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워 만든 학생조직이었다. 대통령이 총재를 맡고 문교부 장관이 중앙단장을 맡았다. 모든 중등학생과 대학생은 의무적으로 가입해 반공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학도호국단은 1960년 4·19혁명 뒤 해체됐고 유신시대에 부활했다가 제5공화국 때 폐지됐다. 이희호의 생각이 학도호국단의 극단적 반공주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 행보에 비판적이었지만, 학도호국단을 이끄는 자리에 누군가 서야 한다면 자기가 하는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이희호 말고 다른 적임자를 찾기도 어려웠다.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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