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담장 가는 남편 고독한 뒷모습에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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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72)
제6부 청와대 시간 - 6회 남북정상회담 하
제6부 청와대 시간 - 6회 남북정상회담 하
6월14일 저녁 만찬장에서 김대중과 김정일은 마침내 ‘6·15남북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축배를 들었다. 사진은 그 순간을 놓친 기자들을 위해 두 정상이 다시 연출한 모습이다.
2000년 6월14일 오후 3시 김대중과 김정일의 정상회담이 백화원에서 열렸다. 회담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아무것도 사전에 합의된 바 없는 백지 위의 정상회담이었다.
김대중은 네 가지 의제를 제시했다. 첫 번째 의제는 화해와 통일 문제였다. “통일은 점진적·단계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하며 통일의 과정은 남과 북이 협력해서 관리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남북연합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김대중은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 문제를 이야기했다. “나는 1998년 미국에 가서 북쪽에 대한 경제제재 조처를 해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니 북쪽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준수하고 미국과의 미사일 회담도 잘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 남과 북이 미국·중국·일본·러시아와 함께 6개국 동북아안보협력기구를 구성해 운영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세 번째 의제는 남북 교류 협력 문제였다. “남북관계를 잘 푸는 데는 경제협력이 중요합니다.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다시 잇고 서해안 산업공단을 함께 건설합시다. 그리고 관광사업도 백두산 관광, 평양 관광으로 넓혀가는 게 좋겠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도 참가하고 시드니 올림픽에도 함께 입장하는 것으로 합시다.” 마지막으로 김대중은 8월15일에 이산가족이 서로 방문할 것을 제의했다. “남북 장관급 회담, 경제공동위원회, 군사공동위원회를 개최하고 이산가족 상봉과 다방면의 교류협력을 실현합시다. 그리고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정식으로 초청합니다.” 김정일은 큼직한 선언적인 내용만 합의문에 넣고 나머지는 장관급 회담에 위임하자고 했다. 김대중은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문에 포함하자고 주장했다. 양쪽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됐다.
논쟁은 통일 방안으로 이어졌다. 김정일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부터 하자고 제안했다. 김대중은 연방제 통일 방안은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대중은 자신이 제시한 ‘3단계 통일’의 첫 단계인 남북연합이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배석한 국가정보원장 임동원이 연방제와 연합제의 다른 점을 설명했다. “연방제는 연방정부, 곧 통일된 국가의 중앙정부가 군사권과 외교권을 행사하고 지역정부는 내정에 관한 권한만 행사하게 됩니다. 연합제는 이와 달리 각각 군사권과 외교권을 지닌 주권국가들의 협력 형태를 말합니다.”
김정일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남쪽이 주장하는 연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하자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두 정상은 ‘북이 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이 제의한 남북연합제가 공통점이 많으니 앞으로 함께 논의해 나가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남북 경제협력에서도 휴전선 가까운 곳에 산업공단을 설치하고 경의선 철도를 연결하기로 합의했다.
2000년 6월14일 오후 3시부터 김대중-김정일 ‘백지회담’ 팽팽 ‘서울 답방’ 끌어낸 뒤 ‘휴회’도 저녁 7시 넘어서 ‘선언문’ 합의
남쪽 주최한 만찬장 ‘화기애애’ “99% 만족” 김정일 마지막 용단 “금수산궁전 참배 안 가도 좋다”
마침내 ‘6·15남북공동선언’ 발표 두 정상 손잡고 올리자 기립박수 “부부에게 일생의 가장 큰 사건”
가장 어려운 것은 김정일의 서울 답방과 제2차 정상회담 개최 명문화 문제였다. 김정일이 버티자 김대중은 마지막에 인간적으로 호소했다. “나이 많은 내가 먼저 평양에 왔는데 김 위원장께서 서울에 안 오면 되겠습니까. 서울에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김정일이 마침내 수락했다. 합의문을 만들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5시22분 정상들은 회담을 중단하고 잠시 휴식했다. “남편이 잠깐 쉬러 왔는데 많이 지쳐 보였어요. 6시쯤 돼서 회담장으로 다시 갈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했지요. 남편의 뒷모습이 무척 고독하고 힘겨워 보였어요. 서서 배웅하는데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요.”
회담이 다시 시작됐다. 김정일은 김대중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제가 대통령께 비밀사항을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군 주둔 문제입니다. 1992년 초에 미국 공화당 정부 시기에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남과 북이 싸움 안 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군이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주변 강국들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의 전략적 가치를 탐내어 수많은 침략을 자행한 사례를 들면서 ‘동북아시아의 역학관계로 보아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미국이 와 있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김 대통령께서는 ‘통일이 되어도 미군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 생각과도 일치합니다.”
김대중이 물었다. “그런데 왜 계속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있습니까?” 김정일이 답했다. “그것은 우리 인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뜻밖의 발언이었다. 김정일은 농담도 덧붙였다. “대통령과 제가 종씨라서 그런지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한 것입니다.” 모두들 웃었다. “김 위원장 본관은 어디입니까?” “전주 김씨입니다.” “전주요? 아, 그럼 김 위원장이야말로 진짜 전라도 사람 아닙니까. 나는 김해 김씨요. 원래 경상도 사람입니다.”
2000년 6월15일 평양의 송별 오찬장에서 남과 북 대표들은 ‘작은 통일’을 이루었다. 김대중·김정일·이희호 모두 일어나 손을 잡고 흔들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장면은 ‘6·15남북공동선언’의 상징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밝아진 분위기는 정상회담 막바지에 누구의 이름으로 서명할 것인지 문제로 다시 팽팽해졌다. 김대중은 김정일이 직접 서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렇다면 수표(서명)는 김영남 위원장과 하고 합의 내용을 내가 보증하는 식으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김대중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쪽 배석자인 김용순이 말했다. “두 분의 존함만 쓰면 어떻겠습니까?” 김대중은 이 제안도 일축했다. “직함을 안 쓰고 이름만 쓰면 여러 오해가 생깁니다.” 김정일이 말했다. “대통령이 전라도 태생이라 그런지 무척 집요합니다.” 김대중이 답했다. “김 위원장도 전라도 전주 김씨 아니오. 직접 서명합시다.” “아예 개선장군 칭호를 듣고 싶은 모양입니다.” “개선장군 좀 시켜주면 어떻습니까.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덕 좀 봅시다.” 김정일이 웃었다. 저녁 7시가 넘어 정상회담이 끝났다. 합의 날짜는 6월15일로 하되 합의문은 이날 저녁에 발표하기로 했다.
정상회담 뒤의 만찬은 남쪽에서 주최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남편이 오지 않아요. 그래서 나 먼저 만찬장인 목란관으로 갔지요. 나는 헤드테이블이 아니라 1번 대표단 테이블로 가서 앉았어요. 우리 쪽 의전상 북쪽에 내 상대역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지요.” 만찬장으로 가는 길에 김대중을 다시 만난 김정일은 합의에 만족을 나타냈다. “99% 잘됐습니다.” 그때까지 풀리지 않은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금수산기념궁전 참배 문제였다. “북한은 금수산궁전 참배를 집요하게 요구했어요. 우리도 ‘국민 정서상 안 된다’고 완강하게 반대해서 해결되지 않은 채 평양에 왔거든요.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이 만찬장에 오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내일 금수산궁전은 안 가셔도 되겠다’고 이야기했대요. 우리 쪽 수행원들이 계속 설득해 북쪽에서 받아들였다고 해요.”
6월15일 송별 오찬장에서도 김정일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희호를 중앙 테이블로 옮기게 배려하고 포도주로 건배를 나눴다.
만찬은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시작됐다. 김대중이 만찬사를 읽었다. “김정일 위원장과 제가 정상회담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다는 것을 보고합니다. 이제 비로소 민족의 밝은 미래가 보입니다. (…) 저는 제 평생에 북녘땅을 밟아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비감한 심정에 사로잡힌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감격을 무엇에 비하겠습니까.” 김정일이 1번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희호를 발견하고 소리치듯 말했다. “여사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산가족이 되시면 안 됩니다. 대통령께서 그토록 이산가족 상봉을 주장하시는데 평양에서 이산가족이 되면 되겠습니까.” 만찬장에 폭소가 터졌다. “그래서 헤드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김 위원장 왼쪽에 앉았지요. 김 위원장은 포도주잔을 들어 ‘건강하십시오’ 하고 건배를 했어요. 스스럼이 없고 활달했어요.”
이희호는 김정일에게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개성 분이고 아버지는 송도고보를 나오셨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김정일이 이희호의 말을 받았다. “여기서는 개성을 ‘깍쟁이’라고 합니다. 개성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개성 토박이에게 음식을 청했는데 양이 적습니다.” 김정일은 남한의 대중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우리나라 영화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어요. 배우들도 알고요. 김정일 위원장이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 것을 다 보고 있다고 해요. 남쪽 유행가도 많이 알고 있고요.”
만찬이 진행되는 중에 남쪽의 임동원, 북쪽의 김용순이 완성된 남북공동선언문을 가져왔다. 6·15남북공동선언은 “남북 정상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한다”고 밝히고 합의 내용을 열거했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공동선언문은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6월14일 저녁 정상회담 뒤 만찬장에서 김정일은 임동원(가운데) 국정원장을 불러 마지막 걸림돌이던 ‘금수산궁전 참배 요구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연단으로 나가 축하인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이 일어섰다. 김대중이 “우리 두 사람이 남북공동선언에 완전히 합의했다”고 발표하자 장내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말로 할 수 없이 기뻤어요.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일생에 가장 큰 사건이었지요.” 김대중과 김정일은 축배를 높이 들었다. 그 순간 공보수석 박준영이 다가와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대통령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까 두 분이 나가셔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고 말씀하신 것을 카메라 기자들이 없어 잡지를 못했습니다.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장면인 만큼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해주십시오.”
김대중이 옆자리의 김정일에게 말했다. “아까 우리가 나가서 한 것을 기자들이 없어서 못 찍었다는데…” 김정일이 즉각 받았다. “그럼 오늘 배우 하십시다. 좋은 날인데 배우 한번 하십시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다시 연단으로 나갔다. “조금 전에 사진을 못 찍었다고 해서 다시 합니다. 우리가 드디어 공동선언에 완전히 합의했습니다. 여러분 축하해주십시오.” 김대중과 김정일은 잡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박수 소리가 우레처럼 쏟아졌다. “두 정상이 손을 잡고 들어올린 장면을 찍은 사진은 그렇게 연출한 것이었어요. 정상회담 내내 연출이 없었는데 그 장면이 유일하게 연출한 것이었지요.”
만찬장은 감격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김정일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 국방위원들 어딨어. 모두 나와 대통령님께 한 잔씩 올리라우.” 대장 박재경을 비롯한 인민군 장성들이 헤드테이블로 와서 인사하고 술을 따랐다. “남편은 술을 마시지 않는데 그날은 따라 주는 술을 몇 잔 마셨지요.” 특별수행원인 시은 고은이 연단으로 나왔다. 고은은 “오늘 아침 숙소에서 우리 민족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다”고 밝히고 <대동강 앞에서>를 낭송했다. 격렬한 목소리가 만찬장을 울렸다. “아 이 만남이야말로/ 이 만남을 위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 백 년 최고의 얼굴 아니냐.”
만찬은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11시20분 김대중과 김정일은 백화원 영빈관으로 옮겨 6·15남북공동선언 조인식을 했다. 두 정상의 서명으로 선언이 확정됐다. 민족사의 분수령이 된 길고 긴 하루가 갔다. “숙소에 온 남편은 너무나 피곤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요.” 이튿날 아침 일찍 찾아온 수행원들에게 김대중이 말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 내 평생 가장 길고 무겁고 보람을 느낀 날이었다. 회담 3시간50분 동안 3시간30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두어 번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는데 이 길이 어떤 길인가. 7000만 겨레의 염원을 생각하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설득했다. 김 위원장의 유연한 사고와 해박한 지식이 도움이 됐다. 합리적이어서 고집하다가도 납득이 되면 생각을 바꿨다.” 76살 대통령이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고 하자 수행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6월15일 평양을 떠나기 전 김정일이 주최한 송별 연회는 화기가 넘쳤다.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이 군부를 대표해 6·15공동선언을 지지했다. 군부의 서약이었다. 김정일이 6·15공동선언의 첫 성과물을 발표했다. “인민군 총사령관으로서 오늘 12시부터 전방에서 대남 비방 방송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남쪽도 다음날 최전방 대북 방송을 중단했다. 오찬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양쪽 수행원들이 김대중과 김정일에게 술을 따랐다. 남과 북이 서로 어울려 어느 쪽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작은 통일이 이루어졌다.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모두 일어나 손을 잡고 합창했지요.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가슴이 뭉클했어요. 남편과 김정일 위원장도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노래했지요. 나도 김정일 위원장 손을 잡았어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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