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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여사 생애

    이희호는 1922년 9월 서울 수송동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의사면허를 취득한 인재였다. 어머니는 한의사집 가정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그 영향을 받아 이희호는 모태신앙인이 됐다.

    이희호는 남아 선호 사상이 지배했던 시대에 아들딸 차별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특히 부모의 열렬한 지원으로 부족함이 없이 공부했다.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다녔고, 1946년 9월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총학생회 사범대 대표를 맡을 정도로 활발하고 진취적인 성격이었다.

    서울대를 졸업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을 내려가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을 결성하며 여성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여성문제연구원 등을 창설하며 여성의 인권과 법적 권리를 도모하는데 몰두했다. 전쟁이 끝나자 1954년 미국 유학을 떠나 램버스대학, 스칼렛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귀국 후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대한YWCA(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일했다. 그곳에서 이희호가 첫 번째로 제안한 캠페인은 ‘혼인신고 합시다’ 였다. 당시 많은 여성들이 자식을 낳고 살다가 젊고 많이 배운 후처(첩)가 혼인신고를 먼저 해버려 빈손으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축첩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60년 4.19 혁명이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첩을 둔자는 국회의원으로 뽑지 말자’는 파격적인 캠페인이었다. 이후 남녀차별적 내용이 담긴 가족법 개정운동과 호주제 폐지 성과를 거두었다.

    여성운동가로 살던 이희호의 인생행로는 김대중과 부부의 연을 맺으며 크게 바뀌었다. 1962년 김대중과 결혼하여 이듬해 11월 김홍걸을 낳았다. 그 당시 낭인생활을 하던 김대중은 1963년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했고, 1967년 재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성장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에 서게됬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쟁한 71년 대선 패배 이후 김대중은 최고통치권자의 최대 정적이 되었고, 이희호의 인생에도 고난의 길이 시작됐다. 같은 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른바 ‘10월 유신’이 단행되었다.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정치탄압은 박정희 정권과 10.26 이후 신군부로 이어졌다. 1971~1987년은 김대중의 정치 인생 중 최대 암흑기였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수 차례의 죽을고비와 함께, 55회 가택연금, 6년간의 투옥생활, 망명 등 가시밭길을 걸어갔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바다에 수장 될 뻔 했다. 미국 등 전 세계의 도움으로 서울 자택에 돌아왔지만, 가택연금을 당하며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김대중은 이에 굴하지 1976년 박정희 유신정권을 규탄하는 ‘3·1 구국선언’을 하면서 구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을 서울에서 가장 먼 진주교도소로 보냈다.

    이 시기동안 이희호는 일주일 간격으로 서울과 진주를 오가며 김대중 곁을 지켰고, 김대중 석방투쟁과 정치활동을 이어나갔다. 또한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병행하면서 건강도 극도로 악화됐고, 관절염 증상도 심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을 겪으며 김대중, 이희호는 단순한 부부 관계를 넘어 독재와 싸우는 조국의 지도자와 동지로 변했다. 김대중 이희호 사저 현관에 걸린 부부 이름이 각각 새겨진 문패에는 이희호 여사에 대한 김대중의 사랑, 존경, 동지의식이 담겨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은 4수 끝에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여성ㆍ사회 운동가였던 영부인 이희호의 영향으로 행정부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탄생했고, 이후 우리나라 정부 최초로 여성가족부가 출범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보건복지부, 환경부도 새로 신설되면서, 여성 장관 4명이 배출되었다.

    이희호는 여성·아동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굶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가장 시급한 해결과제’라고 생각해 ‘배고픈 어린이가 없는 세상’을 위한 봉사단체인 ‘사랑의 친구들’을 만들었다. ‘사랑의 친구들’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여성을 위한 재단으로 ‘한국여성재단’을 발족해 재단의 명예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어린 나이에 감옥에 들어가게 된 소년원 재소자들과 이들의 부모를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하기도 했다. 2000년 7월 소년원생들이 처음으로 청와대를 관람한 이후, 이희호는 청와대를 나올 때까지 ‘전국 모든 소년원생을 만나보겠다’는 생각으로 틈이 날 때 마다 소년원생들을 만나고 함께 뮤지컬을 관람했다.

    이희호는 그동안의 대통령 부인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독자적으로 해외순방에 나서며 총 5차례 해외를 방문했다. 특히 역대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2002년 5월 대통령을 대신해 UN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의장국으로 임시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했다.

    이희호는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옆자리를 지키며 퇴임 후 활동을 도왔다.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도 2015년 8월 나흘간의 방북 일정을 소화하며 ‘사랑의 친구들’과 직접 뜬 털모자와 의약품들을 북한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