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후광(後廣)이라는 호(號)도 고향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비판의식은 어린시절 항일심리에서 싹텄다. 부모님은 일본 지주의 땅을 소작하던 농부였다. 마을 이장이었던 아버지는 주민들5을 대표해 일본인들과 싸우는 일이 많았고, 일제에 의한 수탈이 갈수록 심해지자 이에 저항하는 소작쟁의를 주도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학업을 포기하고 바로 일본인 소유의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이 떠난 회사의 재산관리인 됐고, 그해 11월 회사대표가 되었다. 셈이 빠르고, 사업 수완이 좋아 전남선박 목포조합장·대양조선 사장 등을 지냈다. 후에 목포일보를 인수, 주필을 맡으며 청년사업가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6·25전쟁과 부산정치파동을 겪으며 험난한 정치인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김대중은 목포를 점령한 인민군에게 자산가란 이유로 처형될 위기에 몰렸으나, 극적 탈출해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된다. 이념 대결 하에 서로 학살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며, 남북화해와 통일에 대한 신념을 품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에 잦은 실정으로 권위가 크게 실추되자, 재집권을 위한 정치술수를 동원한다. 공산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미명하에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야당 국회의원들을 강제 연행, 구금했다. 김대중은 친일세력을 두둔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이승만 정권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정치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두 번의 낙선, 세 번째로 도전한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드디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 3일만에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됐고, 김대중은 국회의사당에 발도 못 디뎌본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시기 목포에서 당선된 후 전도유망한 정치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1965년 민중당 대변인, 1966년 민중당 정책위의장, 1967년 통합야당인 신민당 대변인직을 두루 거치며, 타고난 달변으로 야당의 명대변인 소리를 들었다. 필리버스터로 전국적인 지명도도 얻었다.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5시간 19분 동안 쉬지 않고 발언했는데, 이 기록은 국회 최장시간 연설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어느새 김대중은 장기집권을 노리는 박정희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야당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는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와 박정희와 정면대결을 펼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장충단공원 집회에는 100만 명이 운집했고, 그 당시 연설장면은 ‘청년 김대중’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명연설로 회자된다. 그러나 지지율 46%, 98만표 차이(2~3개 시군)로 근소하게 패배한다.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최대 정적인 김대중을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정치탄압은 박정희 정권에 이어 10.26 이후 신군부까지 이어졌다. 1971~1987년은 김대중의 정치 인생 중 최대의 암흑기였다. 김대중은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기고 가택연금 55회, 투옥 6년, 망명 등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김대중은 1973년 8월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해 손과 발에 쇳덩이가 채워 진 채 바다에 수장될 뻔했다. 전 세계 유력인사들의 경고로, 서울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후 가택연금을 당해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통해 박정희 유신정권을 규탄하다 5년형을 받고 수감되었고, 1년이 넘어 석방되긴 했지만 다시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0년 5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음모사태 주범으로 몰아 사형 선고까지 했다. 김대중은 많은 인사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석방된 후에는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 망명중에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이어갔고, 1985년 귀국한 뒤에도 가택연금과 해제는 반복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시대가 열렸고, 김대중은 실형면제와 복권조치를 받았다. 이후 두 차례 대선에서 낙선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준비된 대통령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4수 끝에 마침내 1997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 김대중은 여러 업적을 쌓았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했다. 기초생활보장법을 통해 국민들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했다. 지금의 4대 보험을 완성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사회안전망의 기틀을 확립했다.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여성부와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했다. 전국에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해 IT 강국을 건설했다. 중학교 3년까지 무상의무교육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대한민국 월드컵 축구 역사상 4강 신화를 이뤄냈다.
특히 이전의 정권과 달리 전향적인 대북정책인 ‘햇볕정책’을 고수하며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2000년 6월 분단 55년 만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며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로인해 같은 해 12월 김대중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김대중은 2003년 퇴임 이후에도 남북통일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동북아 및 세계 평화를 위한 각종 구상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갔다.